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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드니에서 신화를 만들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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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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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사의 기록에 도전하는 준비된 스타들… 별들의 잔치를 빛낼 그들은 누구인가

신화는 인간이 상상 속에서 그려낸 이야기. 그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실제 상황으로 느껴지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하늘을 날아 이글거리는 태양 속으로 돌진하는가 하면 밤하늘의 별도 달도 따는 신화의 주인공. 그래서 천년 만년 후세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영웅으로 기억되지 않은가.

올림픽은 세계 스포츠 영웅들이 4년마다 한번씩 그려가는 이야기 터전. 1896년 ‘신화의 무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원한 104년 올림픽 역사. 그간 숱한 별들이 뜨고 졌지만 우리의 영웅들이 남긴 메시지는 올림픽과 함께 영원히 남아 있다.

육상 신화의 산실 ‘3M을 주목하라’


‘미다스의 손’으로 올림픽역사에 쓰여 있는 파보 누르미. 영원한 핀란드인으로 남고자 했던 누르미는 12살 때 아버지를 잃은 한을 올림픽무대에서 금맥을 캐는 것으로 풀었다. 1920년 엔트워프올림픽을 시작으로 1924년 파리,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을 거치며 육상에서 9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1973년 세상을 떠나 핀란드 국장으로 땅 속에 묻혔지만 그는 올림픽에서 ‘살아 있는 신화’로 전해진다.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한 우리가 생생히 기억하는 칼 루이스(미국)는 또 어떤가. 그 또한 살아 있는 신화이자 전설로 통한다. 84년 LA올림픽 육상 100m 금메달부터 시작한 금빛레이스는 96년 애틀랜타올림픽 멀리뛰기까지 이어졌다. 100m 2연패, 멀리뛰기 4연패를 포함해 올림픽 4회 출전에 금메달만 8개. 육상은 종목이 43개로 세분화 되어 있는데다 매종목이 기록경연장이어서 신화의 산실이 되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는 9월15일 호주 시드니에서 개막될 제27회 올림픽에서도 역시 우리는 육상의 트랙과 필드를 주목해야할 이유가 있다. 새로운 신화가 창조되고 영원한 전설이 쓰여진다면 아마도 육상쪽이 첫 번째 테이프를 끊을 것이다.

“3M이 간다.”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미국이 자랑하는 3대 육상스타 매리언 존스, 모리스 그린, 마이클 존슨이 신화를 쓰기 위해 시드니로 간다는 얘기다. 누르미와 루이스의 업적에 견준다면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그들이 있어 시드니의 트랙과 필드는 지구촌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육상 5관왕 노리는 매리언 존스

(사진/메리어존스(왼쪽), 이봉주)
현존하는 여자육상의 걸출한 스타 매리언 존스가 쓰려는 신화는 올림픽 육상 사상 첫 5관왕. 존스는 일찌감치 육상선배 칼 루이스의 4관왕 업적을 한걸음 뛰어넘어 영원한 별로 남으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시드니에선 목에 다섯개의 금메달을 걸고 싶다.” 이력만으로 천부적인 만능스타여서 미국인들의 기대감은 높은 편이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대학 농구팀의 명가드 출신이란 점이 이채로운 전력. 94년 포인트가드로 게임평균 14.2점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시켜 이미 코트에서 정상을 경험했다. 육상으로 전업한 뒤에는 단거리와 멀리뛰기에서 재능을 보여 세계적인 스프린터로 발돋움했다. 100, 200m 석권에 이어 400m 릴레이, 1600m 릴레이에서도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워 금메달을 이끌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그리고 스피드가 받쳐줄 도약력을 뿜으면 멀리뛰기 금메달까지 손에 넣어 금메달 5개를 채운다는 계산이다. 존스의 기록은 현재 100, 200m에선 세계랭킹 1위. 팀 동료 잉거 밀러가 걸림돌로 꼽히지만 금메달이 무난해 보인다. 4명이 뛰는 400m, 1600m 릴레이도 미국팀의 전력을 감안하면 우승이 유력시된다. 때문에 5관왕의 관건은 약점을 보이고 있는 멀리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육상연맹은 존스의 5관왕을 지원하기 위해 올림픽 일정을 조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존스의 남편인 CJ 헌터가 투포환에서 금메달을 따낸다면 최소한 한집안 금메달 5개는 보장되는 셈이다.

(사진/모리스 그린)
모리스 그린과 마이클 존슨은 세계인이 보고 싶어한 ‘세기의 대결’을 무산시킨 죄과가 있다. 100m 세계기록(9초79) 보유자와 400m 세계기록(43초18) 보유자가 중간거리인 200m에서 맞대결하면 누가 이길지 결과가 주목되었으나 그들은 기대를 저버렸다. 지난달 미국 올림픽대표선발전에서 중도기권한 게 원인이었다. 얼마나 실망을 안겼던가.그래도 둘의 존재는 시드니를 빛낼 요인으로 부족함이 없다. 지난해 6월 도노반 베일리(캐나다)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등록한 그린은 이번 올림픽 100m에서 또 한번 신기록 작성을 장담하고 있다. “나는 9초76까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는 심지어 “코치인 존 스미스가 9초60까지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하기까지 했다.

육상 100m 기록 9초60을 향하여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사상 첫 200m와 400m를 동시 석권했던 마이클 존슨도 역시 200m 출전티켓을 놓쳤지만 400m 신기록 경신이 기대된다. 200m서 쏟을 힘을 400m에 집중한다면 42초대 진입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린은 400m 계주, 존슨은 1600m 계주에 출전하기 때문에 일단 금메달 2개씩은 예약했다고 볼 수 있다.

올림픽의 대단원을 장식할 남자마라톤은 인간한계를 시험하는 경연장. 한국의 이봉주가 손기정(1936년 베를린) 황영조(1992년 바르셀로나)의 금메달 신화를 잇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간다.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할리드 하누치(2시간5분42초)가 출전을 포기했다고 좋아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기록보다는 국가의 명예를 건 철각들이 누가 더 인내하고 강한지를 시험받아야 한다. 시드니 마라톤코스는 올림픽사상 최악의 코스로 설계되어 있다. 표고차 20∼40m인 오르막과 내리막이 27개나 버티고 있는데다 기온까지 올라가면 지옥이 따로 없을 듯하다. 워낙 난코스여서 우승기록이 벌써 2시간12∼13분대로 점쳐지고 있다. 스피드는 몰라도 끈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이봉주(2시간7분20초)가 3초차로 은메달에 머문 애틀랜타올림픽의 한을 풀 기회이다. 경쟁자는 안토니오 핀토(포르투갈 2시간6분36초) 이누부시 다카유키(일본 2시간6분57초) 호나우두 다코스타(브라질 2시간6분5초) 등 특급스타들이 거의 모두 출전해 새 천년 첫 월계관을 노릴 것이다.

육상을 떠나도 신화는 현존하는 전설에 의해 계속 쓰여진다. 러시아의 ‘무적레슬러’ 알렉산더 카렐린(32), 터키의 ‘헤라클레스’ 나임 슐레이마놀루(33), 쿠바의 ‘복싱영웅’ 펠릭스 사본(28). 하나같이 강산이 한번 바뀐 긴 세월 동안 패배를 모르고 살았던 무적의 전사들이다. 그것도 모자라 세기를 넘어 완벽한 신화를 쓰려고 또 출사표를 던졌다.

카렐린은 키 191cm, 체중 130kg의 거구로 보기만 해도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란 인상을 준다. 지난 애틀랜타올림픽 그레코로만형 130kg급에서 올림픽3연패를 이뤄 금세기 최후의 투사로 우뚝 섰던 그였다. 세계대회 24회 우승. 1987년 이후 13년간 패배란 말을 모르고 매트 위에서 살아왔다. 인상만으로도 상대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카렐린은 시드니에서도 동급선수에겐 공포의 대상. 그가 있는 한 금메달이 난망하다고 체급을 올리거나 줄이는 선수까지 나와 이미 올림픽 4연패는 떼놓은 당상이다.

레슬링과 역도, 복싱에도 영웅이 있다

슐레이마놀루는 헤라클라스의 현대판 복제인간으로 불리는 천하장사. 지난 세기 역도 64kg급은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영역이었다. 올림픽 3연패를 이뤘고 세계신기록 경신만 60여회. 기록을 조절할 줄도 알았다. 한꺼번에 수십kg씩 늘릴 수 있어 보였으나 그는 조금씩 기록행진을 이어갔다. 힘의 생명인 역도에서 자고나면 등장하는 신예들의 도전을 무찌르는 괴력을 보라. 서른줄 넘어 나설 시드니무대. 힘이 쇠퇴하는 기미가 보이는데도 올림픽 출전을 강행한 결과는 어떻게 나올지.

아이언펀치를 자랑하는 사본의 올림픽 3연패도 관심이다. 누가 감히 그의 주먹 앞에 나설지 모르겠다. 86년 세계선수권대회서 우승한 뒤 줄곧 패배를 몰랐다. 88서울올림픽에 쿠바가 불참하지 않았더라면 4연패 도전이 된다. 그는 쿠바에서 전설적인 복싱영웅으로 남아 있는 테오필로 스테벤손에 이어 2번째 올림픽 3관패를 맡아놓은 셈이다.

(사진/한국의 '돌아온 신궁' 김수녕도 새로운 신화를 준비하고 있다.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유럽그랑프리 양궁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의 ‘돌아온 신궁’ 김수녕(29)도 신화의 대열에 동참하려 한다. 88서울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했을 때의 17살 여고생은 어느덧 한국나이로 서른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92년 바르셀로나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더했지만 개인전 2연패가 좌절돼 스스로 살아 있는 신화로 대접받기엔 모자란다고 시인한다.

그래서 7년 만에 녹슨 활을 들고 사대에 복귀해 지난 6월 지옥 같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다. 그리고 이달 초 8년 만에 선보인 국제무대에서 신궁은 건재를 과시하고야 말았다. 유럽그랑프리 양궁대회 2관왕. 신궁의 화살이 금과녁을 뚫자 세계양궁계가 놀랐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가 밝힌 목표는 12년 만의 개인전 우승탈환과 한국의 5연속 단체전 석권. 그렇다면 개인적으론 올림픽 통산 금메달 5개를 따내 한국올림픽 사상 최다금메달 획득자로 남게 될 터이다. 그만하면 신화라고 얘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국도 전설의 스타를 배출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영국의 조정스타 스티브 레드그레이브(38)는 김수녕에 비하면 한수 위로 보인다. 84년 남자 유타포, 88, 92, 96올림픽에선 무타포에서 4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모자랐다. 4년 전 물 위의 퇴장을 선언했으나 아내와 두딸의 권유를 못이겨 다시 노를 저어 시드니로 항해를 시작했다. 1932년 LA에서 60년 로마올림픽까지 펜싱 남자 사브르에서 6회 연속 우승한 헝가리의 어러더르 게레비치가 역사 속에 있긴 하다. 역사를 다시 쓰고 싶은 모양이다.

한국도 전설의 스타를 배출할 건가

(사진/'인간 개구리' 쿠바의 하비에르 소토마요르.약물 양성반응으로 2년 동안 출전자격을 정지당했던 그는 복귀무대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기대할 수 있는 기록을 세웠다)
‘인간개구리’ 하비에르 소토마요르(32·쿠바)는 좌절을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날려 한다. 그는 지난해 7월 팬암게임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인 코카인 양성반응을 보여 2년간 선수자격이 정지되어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약물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란 그의 결백투쟁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감형을 받아 지난달 복권, 시드니로 가는 길이 열렸다.

세계기록(2m45) 보유자인 그가 지난 16일 복귀무대인 몽토방 국제육상대회에서 수립한 기록은 2m28. 자신의 기록에 한참 모자라도 8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거둬들이는 데 지장이 없을 듯하다.

훈련의 과학화가 진행되고 체력이 우수한 신예들이 날마다 배출되는 스포츠세계. 이미 부와 명예를 한몸에 거머쥐어 슈퍼스타가 된 그들이 “무엇이 모자라 또 나섰느냐”란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도 “신화 또는 전설로 남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권부원/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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