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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 남편한텐 농담도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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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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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의 부인 노재열 교수가 말하는 고지식한 남편, 그가 없어 집안일이 안 돌아가는 이유

사진/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당연하게 여겼구나." 강정구 교수의 서재에서 남편의 사진을 매만지는 노재열 교수.(이용호 기자)
퇴근길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노재열 교수(54)는 어둔 집안에 불을 밝힌다. 전 같으면 남편이 식탁에 아늑한 불을 밝히고 아내를 맞아주었을 텐데. 지금 남편 강정구 교수는 구치소에 갇힌 몸이어서 그렇게 해줄 수가 없다.

남편 일로 신경을 쓴 탓인지 목이 쉰 노 교수에게 남편의 안부를 물었다. “예, 뭐… 워낙 표현을 잘 안 해요. 좀 수척하지요. 집 걱정, 학생들 못 가르치는 걱정하고 있지요.”

26년간 아내에게 깍듯한 존대어


8월 중순 북한방문단사건 이후 노 교수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남편이 죄인이 되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아내는 세상의 논리와 잣대로 뭐가 얼마나 잘못되었고, 어디 어떤 이유가 합당한지 따지기 전에 그냥 “내가 진작 말렸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

“제가 몸이 좋지를 못해서 사실은 이번 북한 가는 것을 말리고 싶었어요. 우리 아기 아빠도 자기보다는 통일에 대해 생각이 다른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가보는 게 나을 거라고 처음에는 자리를 양보했어요. 제가 가지 말라고 했으면 안 갔을 거예요.”

확실히 그것은 맞는 말이다. 남북관계를 전공하는 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북한을 직접 보고 오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남편 강정구는 아내 노재열이 가지 말라 했더라면 진짜 안 갈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만나 연애결혼해서 26년간 살아오면서 그는 아직도 아내에게 깍듯이 존대어를 쓴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아내에게 행여 집안일이 걸림돌이 될까 늘 힘써주는 남편이다. 아내가 잠들면 발꿈치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엄마 깨실라.” 자연히 두 아들도 발끝으로 걷는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노 교수는 연구와 강의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정신이 없다. 남편이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갔어도, 매일매일 평양의 소식이 뉴스를 장식했을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만경대정신” 운운하는 말이 뉴스에 나왔을 때에도 그랬다.

“저는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단순해요. 통일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얼핏 그 말이 항일투쟁정신과 관련있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어요. 더구나 통일을 위해 남북한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한 말을 가지고 누굴 저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남편이 그 와중에 있는 줄은 나중에 알았다. “우리 아기 아빠는 학자예요. 자신이 하는 말을 정치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 말을 할 적에도 별다른 뜻을 담고 한 게 아닐 거예요. 학자적 양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학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해요. 그런데… 저 사람이 안에서 저렇게 있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퍼요.” 노 교수의 눈가에 눈물이 비치는 듯했다.

빨래와 청소 담당은 '물으면 잔소리'

사진/ 남편이 해질 때까지 쓰던 수세미. 결혼생활 내내 강 교수는 가사의 중심에 있어왔다.(이용호 기자)
누군가 느닷없이 노 교수의 울타리를 걷어가버린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텅 빈 듯하다니. 노 교수에게 남편의 부재는 심리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타격이 크다. 집안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 내내 남편은 가사의 중심에 있어왔다. 공부하는 아내의 뒷바라지를 위해 아이 키우고 집안일하는 것은 자연스레 거의 남편의 몫이었다.

“집안일을, 아내를 도와준다라고 생각하면 한달을 못 버틴다는 게 아기 아빠의 생각이에요. 내 일이라고 생각해도 하기 싫은 게 집안일이란 거지요.…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 둘 샌드위치 싸주고 제 점심도 싸줬어요. 전 원래 아침을 안 먹거든요. 자기 아침은 자기가 직접 끓여먹지요. 떡국을 좋아해요.”

부엌 싱크대에는 수세미가 종류별로 단정하게 놓여져 있고 가스조리대에는 기름기가 배지 않도록 누런 종이봉투가 가지런히 받쳐져 있었다. 빨래와 청소 담당은 물으면 잔소리 같아 보인다. 그런데도 노 교수는 큰소리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설거지하고 나서 그릇을 잘 챙겨놔야지 다음에 쓸 때 편리하고 또 그릇 이도 안 빠지잖아요, 그렇잖아요?” 아무래도 이 커플에게는 ‘부부 평등상’은 좀 어려울 것 같다.

아파트 거실바닥에 끈이 풀려 떨어진 대나무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이방 저방 둘러봐도 괜찮아 보이는 살림살이도 별로 없다. 참, 붙박이장하고 소파는 새거였다. “글쎄, 우리가 제대로 살림을 못해서인지 둘이 벌어서도 사는 게 이래요. 더구나 우리 아기 아빠는 비싼 것은 아예 사는 게 아닌 줄 알아요.”

다음은 아내가 살펴본 남편의 알뜰 살림법.

“저녁에 삼겹살을 구워 먹은 뒤에는 녹차가 좋다고 하면서 식구들한테 만들어줘요. 한번만 우려내면 아깝다고 다 모아서 말렸다가 다시 한번 끓이지요. 그리고 또 말려요. 냄새 없애는 데 좋다면서 냉장고 안에 둬요.” 쓰레기도 철저히 분리수거한다. 물기 많은 것은 베란다에서 말린다는 원칙을 항상 지킨다. 비오는 날 그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함부로 쓸어버렸다가는 큰일난다. 현재 베란다가 깨끗한 이유는 강 교수가 ‘집에 없기’ 때문.

수돗물 아껴 써라. 샴푸 대신 비누로 해라. 2000년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모자라게 되는 거 아느냐, 등등 알고는 있지만 꾸준히 실천하기 참 어려운 사항들을 가족에게 늘 타이른다. 행여 누구라도 토를 달면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한결같다. “알면서 아니 행하면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노 교수 부부는 늘 함께 시장을 보는데 어쩌다가 부인이 값을 흥정할라치면 남편이 옆구리를 툭툭 친다. “그 할머니가 얼마를 더 얹어 판다고 그걸 깎으려 드느냐”는 핀잔이 곧장 따라온다.

노 교수는 남편과 고향이 같다. 경남 창녕의 같은 동네에서 윗담 총각과 아랫담 처자로 같이 자라났다. 노 교수는 비교적 형편이 넉넉한 데 비해 당시 강 교수네는 그야말로 청빈하기만 했다. 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마흔까지만 돈을 벌고 그뒤에는 공부할 것이라고 아내에게 천명했었다. 그러다가 약간 이른 서른여덟에 다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문교부 유학생 선발시험을 치르고 아내가 미리 가 있던 미국으로 가서 함께 공부를 마쳤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성격이 서로 바뀌었다고 해요. 저는 다혈질에 목청도 높고 금방금방 감정을 표시하는데 우리 아기 아빠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다정다감하고 고운 성격의 남편을 응당 그러려니 살다가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단다.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당연하게 여겼구나.” 노 교수는 뭔가 깨달은 것이다

솔직하고 가감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데는 노 교수도 남편 못지않아 보이건만 남편의 고지식함에 언제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면서 ‘지혜로운’ 세상살이에 대해 조언을 해왔다. 물론 별 효과는 없었다.

“너무 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아서 어떨 때는 바보 같아요. 농담을 하면 진담인 줄 알고 고민고민하는 사람이에요.”

미국유학 시절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형, 뭐해?” “응, 나 파 다듬어.” 그 다음에 그 후배가 전화를 해서 농담으로 “형, 지금은 배추 다듬어?”라고 물었더니 마침 배추를 다듬고 있던 강 교수는 “너 어떻게 알았니?” 하며 후배의 신통력에 크게 놀라워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365일 맨정신으로 산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생활태도라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대충이라도 때우는 식의 대답 같은 것은 사전에 없다. 농담도 잘 모른다.

"통일은 몇%? 어떻게 그런 얘기를…"

사진/ 금강산에서 부부가 함께.
어느 일요일, 밖에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오늘은 통일을 몇 프로 했느냐”고 농담삼아 물었다. 그랬더니 남편은 정색을 하고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하느냐? 그 엄청난 통일을 감히 몇 프로냐고 농담으로 물을 수가 있느냐?”고 서운해하더란다.

가족들에게조차 한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남편이 ‘강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든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에둘러 말하는 기술도 없고, 틀리면 틀리다고 그 자리에서 말해야 하는 성격이니 그런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지하철에서도 자리 양보 안 하는 학생들을 그냥 못 넘긴다. “너희는 자리 양보하느냐?”했더니 “우리는 안 앉아요, 아버지”라고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단다. 대학 졸업반인 큰아들은 군대갔다 와서야 휴대폰을 지닐 수 있었다. 옛날에는 전화없이도 잘만 살았다는 남편을 겨우 설득했다.

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노 교수에게 자작시를 건네주곤 했다. 지금도 해마다 둘이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고 카드를 건네주는 로맨티시스트다. 어쩌다 아내가 미리 집에 와 있으면 아이처럼 좋아한다는 남편. 지금 그의 아내가 그 대신 집에 등불을 켜고 있다. 아내는 이번 크리스마스 전에 남편으로부터 카드를 받기를 소망하고 있다. 따스한 온기가 있는 손을 맞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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