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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원한 나이스 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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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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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도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액션의 마에스트로’ 성룡을 추억하며

사진/ (씨네21 오계옥 기자)
내가 처음 성룡의 영화를 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중국집에서 열린 계모임에 참석하셨다가 우연히 중국영화 한편을 보신 어머니의 권고 덕분에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됐는데, 그게 바로 <취권>이었다. 당시 나는 이소룡에 별 흥미가 없었고, 무술에는 더군다나 관심이 없었다. 가끔 학생용 가방의 중간 틈새(대부분 실내화를 그곳에 넣곤 했는데)에 쌍절곤을 넣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고, 무협소설을 탐독한 뒤 개천을 ‘황룡강’ 어쩌고 하며 비장한 검객의 무공을 떠들어대던 친구도 있었지만 난 그런 게 다 황당한 일들이라 여겼다. 하지만 <취권>을 본 뒤 이상할 정도로 성룡 영화에 빠져들며 무술에 매력을 느꼈다. 급기야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친구를 따라 합기도 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엔 쿵후도장도 인기가 있었는데, 그 도장에 입문하면 두달 동안은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담력 훈련만 한다는 소문이 돌곤 했다. 성룡의 무술이 한국의 합기도에 근거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합기도를 배운 것 같다. 어머니가 “이제 고등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지”라고 권고하시기 전까지 꼬박 1년간 난 무공 연마에 심혈을 기울였다.

클론에서 액션 안무가로의 변신

사진/ <취권>은 초기 성룡 영화의 단순한 플롯을 잘 보여준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지만 종종 성룡의 영화가 주는 최초의 매력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내가 무공 연마에 매력을 느꼈는지 생각해보곤 한다. 아마도 영화에서 보이는 성룡의 독특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소룡과 성룡의 이미지는 확실히 다르다. 이소룡은 원래부터 ‘용’이었고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수였으며, 처음부터 전설이었다. 종종 사람들은 이소룡이 “3피트 정도의 거리에 있는 적을 500분의 1초 만에 제압하고, 공중에 던진 쌀을 젓가락으로 잡을 수 있으며, 두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100파운드짜리 샌드백을 옆차기로 뚫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성룡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용이 되려 애쓰는 무공 연마생’에 가까워보였다. 이소룡의 강렬한 영화들과 비교해볼 때 <취권>은 초기 성룡 영화의 단순한 플롯을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강한 자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뛰어난 사부와 무공 연마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공을 연마하고자 한 것도, 사부를 찾고 싶었던 것도 아마 ‘용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성룡은 실제로 1973년 이소룡이 33살의 나이로 의문사한 뒤 홍콩 영화계가 발굴한 제2의 이소룡이었다. 하지만 성룡은 태생부터 이소룡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소룡이 미국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은 반면, 성룡은 1954년 홍콩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홍콩 경극학교에 입학해 정규교육 대신 춤, 노래, 애크러배틱을 배우며 불운한(어쩌면 행운인)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70년대 초 스턴트맨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이른바 밑바닥부터 시작한 배우다. 그가 처음으로 보여준 무술은 게다가 ‘영혼을 표현하는 몸의 운동’이라 불린 이소룡의 무술과는 거리가 먼 흔들리는 신체의 이미지, 즉 취권이었다. 이소룡이 군살없는 마른 체구에 긴 얼굴과 강렬한 눈빛을 지닌 전형적인 무사형인 반면 성룡은 주먹코에 둥근 얼굴을 지닌 머슴 스타일에 가깝다. 또한 이소룡의 무술이 적을 잔인하게 패는 가학형이라면 성룡의 그것은 최후의 승리 전까지는 끝없이 두들겨 맞는 피학형이었다. 한마디로 이소룡의 액션이 천상의 그것이자 몸의 영예를 표현한다면, 성룡의 액션은 지상의 노고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처음부터 이소룡의 클론이 될 소질은 없었다.

80년대 초, 철없던 학생 시절엔 이소룡과 성룡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가 궁금했다. 이런 상상 속의 대결은 오랫동안 지속됐는데, 그 대결의 종지부를 알린 건 기묘하게도 성룡의 영화 한편이었다. 그 영화가 바로 <프로젝트 A>다. 1983년작인 이 영화는 예전의 성룡 영화와는 확실히 달라보였다. 분명 이 영화는 <취권> <사제출마> <사형도수> 같은 권법류의 영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모든 액션은 현대적인 도심 한복판에서, 그것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시장 골목에서 발생한다. 지형 지물과 소품을 사용한 애크러배틱에 가까운 액션 개그는 이전 영화보다 더 세련된 것이었고, 싸움이라기보다는 정교한 실내(외) 세트를 배경으로 잘 안무된 공연에 가까웠다. 성룡은 쿵후를 마스터한 하산한 고수이거나 새로 사부를 영입한 사제처럼 보였다. 처음엔 그 사부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그의 실질적인 사부가 쿵후 고수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룡의 액션 개그는 무성영화시대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코미디 스타였던 버스터 키튼과 해럴드 로이드의 슬랩스틱 개그나 할리우드의 탁월한 춤꾼인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의 안무에 근접한, 한마디로 운동의 신성한 역동성을 표현하는 안무에 근접한 것이었다.

액션개그와 다큐멘터리 NG모음의 조화

사진/ 9월 말 개봉하는 <러시아워2>에서 성룡은 오십줄에 든 나이가 무색한 건재를 과시했다.
성룡은 게다가 액션의 진실성을 추구한다.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해 반복해서 보여주거나 액션 전체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액션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성룡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NG장면이 유독 눈길을 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룡 자신만의 작가적인 서명이 그만의 독특한 액션 개그에서 기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적인 액션이 NG모음에서 완성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NG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실수들이지만, 그 실수는 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그리고 그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성룡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그뒤로도 오랫동안 성룡은 거의 매년, 그것도 추석 무렵에 영화 한편을 들고 늘 우리를 찾아왔다. 사실 NG모음에서 보이는 위험성은 역설적으로 성룡의 건재함과 자신감을 증명하는 것, 이를테면 ‘이런 장면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지, 이건 성룡만이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룡은 어쩌면 늘 두편의 영화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하나가 액션 개그라면 또다른 한편은 성룡에 관한 사실적인 다큐멘터리인 NG모음이다. 그 이후 난 이소룡과 성룡을 비교하거나 상상 속에서 그 둘의 대결을 더이상 주선하지 않았다. 성룡의 액션은 이소룡이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 이후 가끔 또다른 상상을 하곤 했는데, 이번엔 좀더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 상상은 만약 이소룡이 33살의 나이에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혹은 80년대 초에 성룡이 할리우드에 입성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상상의 결론은 여전히 미지수다. 이소룡이 살아 있었다면 홍콩 무술영화가 과연 할리우드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성룡의 입지 또한 넓어질 수 있었을까? 이소룡의 의문사 뒤에는 홍콩영화의 할리우드 입성을 저지하려는 미국 영화자본의 음모가 있었다는 황당한 상상(?)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그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 상상의 결론은 늘 아쉬움으로 끝을 맺는다. <러시아워>나 <샹하이 눈>에서 40대 중반의 성룡이 힘겹게 곡예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쾌찬차>나 <용형호제>의 혈기왕성한 성룡의 얼굴이 아련히 스쳐지나가곤 한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지경이다. 이럴 땐 박찬호에 목을 맨 열광적인 야구팬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투덜댔던 <빅 타임>에는 최근 성룡의 영화에선 보기 드문 일대일 승부가 있다. 이 장면은 15년 전에 만들어진 <쾌찬차>의 미국 킥복싱 챔피언 데니와 성룡의 대결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여기서 평소 무술 연습에 태만했던 성룡은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상대를 얕보다 호되게 당한다. 성룡과 평소 앙숙으로 지냈던 친구는 성룡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처음엔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왠지 씁쓸하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장면을 지켜본 성룡의 팬들 또한 마찬가지로 씁쓸한 느낌을 쉽게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해는 동쪽에서 뜨지만 서쪽에서 진다”

어쨌든 40대 후반의 나이에 성룡은 할리우드에 성룡이 아닌 재키 찬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입성했다. 80년대 초의 실패는 아시아의 매 성룡과 할리우드의 재키 찬이 어떻게 다른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시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인터뷰에서 “비록 내가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지라도 나는 미국에서 유명해질 순 없었을 것이다. <쥬라기 공원>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연 배우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관객은 성룡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간다. 제목이 어떻든 이야기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단지 성룡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해 갈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최근 성룡이 미국에서 만든,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을 보면 늘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샹하이 눈>의 후반부에서 장웨인(성룡)은 납치된 공주를 구출하러온 중국 황제의 근위대에게 “해는 동쪽에서 뜨지만 서쪽에서 진다”라고 말한다. 미국에선 미국의 율법을 따라야만 한다는 말이다. <러시아워>에서 흑인 형사 크리스 터커는 성룡에게 미국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비치 보이스 같은 백인 음악이 아니라 흑인 음악을 들으라고 권한다. 반면 홍콩이 주무대인 <러시아워2>에서 성룡은 크리스 터커에게 홍콩에선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을 준수하는 것, 그것은 영화로 치자면 장르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샹하이 눈>이 서부극을 패러디하며 로버트 레드퍼드와 폴 뉴먼이 주연한 <내일을 향해 쏴라>의 버디무비 세계로 진입한 것처럼 <러시아워>와 <러시아워2>에서 성룡은 흑인인 크리스 터커와 짝을 이뤄 미국의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리고 홍콩 대로에서 미국적인 가치와 홍콩의 율법을 준수하며 악당들과 싸운다. 이것이야말로 성룡의 생존방식이다.

<리쎌 웨폰4>에서 천하의 이연걸이 멜 깁슨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며 서글펐던 적이 있다. 성룡은 아시아인인 우리가 그런 장면을 보며 당혹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블랙 레인>에서 마이클 더글러스의 상대역인 악당의 리더를 제의받았지만 거절한 바 있다. 이미지의 손상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영화에 출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룡은 종종 “난 취미로 영화를 만든다. 난 돈이 필요없다. 내가 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나는 무술 안무가로서의 예술적인 재능을 포기하면서까지 타협하고 싶진 않다. 악당 역을 맡고 싶지도 않다. 아시아의 팬들은 내가 늘 나이스 가이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난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제 그는 쉰에 접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그리고 아마 이후로도 나를 그다지 실망시키진 않을 것 같다. 그저 아쉬움이 조금 남을 뿐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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