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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좋은 소리’에 대한 오마주

평범한 직장인이 명품 음반 레이블 ‘ECM’ 전시회 열어… 누구나 흥미롭게 관람 가능한 고요하고 아름다운 음악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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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12 17:12 수정 : 2013-09-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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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오랜 팬덤을 가진 음악 레이블이 있다. “ECM에서 나온 앨범을 모아 듣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ECM은 마흔다섯 해째 진지하고 정교하게 동시대 음악을 조명하는 레이블이다. ECM 안에서 서로 다른 장르들, 재즈와 클래식, 현대음악과 민속음악은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1969년 ECM을 창립해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프로듀서 만프레트 아이허는 커버 디자인부터 음악을 녹음하고 담는 방식까지 모든 것을 예술적 경지로 끌어 올려놓은 프로듀서로 평가받는다. 팬들이 믿고 사는 세계적 레이블이지만 ECM은 여전히 열댓 명의 인원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음반 제작사다. 그럼에도 40여 년 동안 1400여 장의 앨범을 냈다.

“ECM의 다양성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 ECM이 만들어온 음반을 오래 들어온 한 사람이 있다. 여느 팬이 그렇듯, 새 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음반 가게로 달려가 앨범을 사고 만지고 듣는 모든 과정을 기꺼운 마음으로 해온 지 20여 년, 그 마음을 모아 이번에는 좀 거창한 것을 기획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김범상(40)씨는 ECM의 오랜 팬이다. 한 번도 전시 기획을 해본 적 없는, 자신의 표현대로 “좋아하는 마음과 진심만 가진 생초짜”가 총 다섯 층의 미술관을 가로지르는 전시 ‘ECM전: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기획했다. 그것도 ECM 본사마저 깜짝 놀랄 수준으로.

ECM은 동시대 음악과 유러피언 재즈를 가장 아름다운 질감으로 담아내는 레이블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 최초로 기획된 한국 ‘ECM전’은 평범한 음악팬에 의해 구상됐다. 기획자 김범상씨가 ECM 발매 음반을 전시해놓은 벽 앞에 서 있다.김명진
자신이 무슨 일을 벌여놨는지 “지금도 좀 얼떨떨하다”는 김씨는 지난해 가을, ECM 연주자들이 올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계획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시회도 열 계획이었으나 몇몇 미술관이 음반회사 전시를 어떻게 하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ECM’과 ‘전시’라는 두 단어가 동시에 귀에 들어오자 가슴이 떨렸다. “내가 한번 해볼까.” 이유는 단순했다. “ECM을 좋아하고 잘 아니까.” 지인과 전시 기획서를 만들어 독일에 보냈다. 마침 그해 겨울 뮌헨에서 ECM 전시가 기획 중이었다. 독일에서 연락이 왔다. “그럼 한번 방문해, 전시도 같이 보자.” 고민의 여지 없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전시를 보니 오히려 의욕이 솟구쳤다. “개인적으로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전시를 기획한 오쿠위 엔위저는 아프리카 미술 전문가다. 급진적인 작품을 큰 비엔날레에 많이 소개해왔는데, ECM 전시는 리버럴하고 아방가르드한 흑인 뮤지션들의 작품 중심으로 꾸몄다.” 김씨가 느끼기에 그것은 ECM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굉장히 서정적인 작품도 많고, 영화와 관련된 것도 많고, 아름다운 커버도 많다. 뮌헨 전시가 1970년대 흑인 음악의 자유로움을 담은 것이라면 나는 ECM의 다양성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김씨가 기획한 전시는 ECM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음악과 친하지 않은 이라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로 안내된다. 전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 지면으로 떠오르는 동선이다. 전시장에 첫발을 들이면 음악과 함께 물빛 천 조각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노르웨이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케틸 비외론스타드의 ‘더 시’(The Sea·1995) 앨범에 담긴 곡이 흐른다. “어딘가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 끝없는 호수 같은 게 펼쳐지고 ECM의 서정적인 음악이 확 나오는, 그런 첫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다.” 김범상씨의 설명이다. 바다 혹은 호수가 일렁이는 방을 지나면 박스가 잔뜩 세워져 있는 방이 나온다. 아래가 뚫린 채 세워진 박스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박스 귀퉁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음악이 흘러나온다. 박스 밖으로 나와 다시 보니 겉면에 연주자와 앨범에 대한 정보가 시시콜콜 새겨져 있다. 유희하듯 각 음악가가 펼쳐내는 작은 세계를 옮겨다니다보면 어느새 다른 방으로 이어진다. ECM을 대표하는 혹은 가장 대중적인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의 연주 현장, 작업을 담은 기록이 전시돼 있다. 발걸음을 옮기면 ECM에서 발매된 모든 앨범이 한 벽을 채우고 있다. 차례로 층을 오르면 즉흥 음악인 재즈에만 몰입했던 ECM이 작곡 음악 앨범을 발매하기 시작한 뉴시리즈, 장뤼크 고다르 등 영화계와의 교류, 고요하고 적막하고 아름다운 앨범 커버, 레코딩 작업의 치열한 흔적, 연주를 진지하게 듣고 최적의 작업 환경을 만들어주는 만프레트 아이허의 프로듀싱에 깊은 신뢰를 보내는 연주자들의 멘트 등 앨범에 관여한 많은 이들의 작업 기록이 넘실댄다. 전시된 음반의 대부분은 하이엔드 헤드폰으로 청취할 수 있다.


ECM, 전시 기념 이례적 앨범 발매

ECM은 이번 전시를 위해 ECM 창고에 담긴 자료를 모두 개방했다. 길고 복잡한 계약서 뭉치보다 한 번의 악수로 연주자와의 계약을 대신한다고 알려진 아이허는 처음 만난 타국의 팬이 기획한 전시에 대해서도 “잘 해보라”는 인사로 대신했다. 생애 첫 전시를 기획한 김씨는 자신이 상상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설득하며 좌충우돌을 겪기도, 사재를 털어야 하는 순간도 맞닥뜨렸지만 어쨌든 이번 전시는 ECM이라는 특정 레이블에 관한 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로 주목받고 있다. 편집 앨범을 잘 내지 않기로 소문난 ECM이지만 이번 서울 전시를 기념해 키스 재럿 등 유명 연주자의 곡을 포함해 미발매 곡을 포함한 컴필레이션 앨범 <리 서울>(re Seoul)을 발매할 계획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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