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건이 다른 세 거포의 혈전 시대… 그러나 매스컴이 원하는 영웅은 백인
미국은 지금 전쟁중이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대참사 이후 탈레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선전포고가 내려졌다. 공과 방망이로 하는 국민의 여흥(national pastime)인 야구도 그러하다. 훗날 야구 연감을 정리하는 이들은 98년부터 2001년까지를 ‘홈런 전쟁의 시대’로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70홈런의 시대를 열어젖힌 98시즌의 마크 맥과이어(37·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2001년 9월22일(이하 한국시간) 현재 64홈런을 기록, 불과 3년 만에 홈런 역사를 갱신하려는 배리 본즈(36·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그리고 맥과이어와 98년 ‘세기의 홈런경쟁’을 벌였던, 새미 소사(33·시카고 컵스). 홈런 삼국지의 좌장들은 4년간 ‘화려한 내전’을 치르고 있다.
미국 부성의 상징, 맥과이어
이들 셋은 출신성분도 성장환경도 전혀 다르다. 서로 다른 타격 스타일을 대변하는 듯하다. 똑같으면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 다른 팀에서, 다른 목표를 갖고 야구를 직업으로 삼은 3인방이다.
캘리포니아 포모나 출신의 백인 맥과이어는 미국의 상징이다. 떡 벌어진 어깨, 6피트5인치의 신장에 250파운드의 몸무게는 서부 개척시대의 광부를 연상케 한다. 공교롭게 맥과이어는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복장인 오버올(멜빵 바지)을 입고 자주 등장한다. 미국 낙농업협회의 우유 촉진 캠페인 광고(우유 한컵을 들고 수염에 밀크자국이 묻어나는)가 그러하다. 햄버거 ‘빅맥’은 그의 별명. 99년 그가 쏘아올린 공들은 미국야구의 인기 회복이자 동시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부권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계 화면을 지켜봤던 이들은 기억하겠지만 9월8일 시카고 컵스전서 70홈런을 때려낸 뒤 그는 배트보이인 아들 매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맥과이어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시절이던 88년 가을 아내 캐시와 이혼에 합의했다. 매튜가 아직 한참 어릴 때였다. 맥과이어는 87년 입단 당시 신인 50홈런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들 매튜의 출산을 보기 위해서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과 다 바꿀 수 있는 피붙이였다. 100만달러의 아동학대 방지기금을 사회에 출연하는 까닭도 아들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스타로서의 공인의식을 강조하는 미국 스포츠계는 맥과이어의 스토리를 높이 평가한다. 따라서 그가 안드로스틴다이온이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금지약물을 장기간 복용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는다.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장딴지 부상 탓에 출전이 뜸했지만 아직도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맥과이어의 경기를 보러 야구장을 가득 메운다. 37년 만에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기록을 깬 영웅에 대한 예우다. 아프로-아메리칸 배리 본즈는 야구 자체로만 따지면 불세출의 선수다. 피츠버그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바비 본즈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잘 뛰고, 잘 때리는 선수를 놓고 흔히들 호타준족이라 하는데 배리 본즈를 빼고는 사실, 아무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미국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400-400클럽(홈런 도루)에 가입했고, 그의 야구 경력이 좀더 이어진다면 500-500클럽 달성도 가능하다. 현재 개인 통산 558홈런으로 역대 통산 홈런에도 8위에 랭크돼 있다. 현재 뛰고 있는 현역 선수 중에서 만약 배리 본즈가 은퇴 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결코 구경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다. 앞서 밝혔지만 본즈는 야구 명문가 출신이다. 미국은 야구 자체가 대물림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러한 야구 가문 중에서 바비 본즈-배리 본즈는 가장 화려하다. 본즈의 아들 또한 피츠버그에서 프로 2년째를 맡고 있는 야구 3대 집안이다. 천재는 오만하게 마련이다. 거만하고 삐딱해도 천재라 용납해주는 경우가 많다. 본즈의 이런 에고이스트 기질은 종종 지적돼 왔다. 96년 40-40홈런 달성을 앞둔 상태에서 본즈는 “팀 동료들이 도대체 도와주질 않는다. 실력이 맞아야 함께 야구를 할 것 아닌가”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팀 동료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을지는 불보듯 뻔했다. 98년 유에스에이 투데이 발간 <베이스볼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아마도 은퇴할 때까지는 500-500클럽 달성이 힘들 것으로 보인다”며 동료들과의 어려운 관계,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 등에 대해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아내의 도움을 얻어 자세를 바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팬들, 많은 언론매체와의 접촉을 꺼리는 형편이다. 야구 명문가 본즈, 그러나 흑인
기록 갱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본즈의 홈런 행진이 여론을 몰고가지 못하는 이유는 매스컴과의 불편한 관계 탓도 있다. 또 37년을 끌다 깨진 기록이 곧바로 갱신될 경우 ‘약발’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면도 있고, 테러로 중단된 사정도 있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얘기되진 않지만 배리 본즈가 흑인인 것도 작용할 것이다. 한국인 팬들에게 친숙한 LA다저스를 보면 알겠지만 개리 셰필드가 인종 차별과 관련한 민감한 발언을 하면 지역 언론은 곧바로 폭격을 가하고, 유대인 숀 그린이 안식일 출전 거부 선언을 하면 어느새 ‘다양한 의견’ 존중으로 바뀐다.
이런 태도는 새미 소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미국야구의 주요 선수 공급원인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새미 소사는 어려서부터 과일 행상, 구두닦이를 하며 자랐다. 대부분의 도미니카 어린이들처럼. 16살에 마이너리그 입단테스트를 받았던 소사가 손에 쥔 계약금은 3500달러. 애초 출발부터 다른 셈이다. 오랜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93년 시카고 컵스로 이적한 뒤 뒤늦게 꽃을 피웠다.
라틴계 메이저리거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다른 선수들처럼 그의 대부다. 소사는 고향의 대지진 때 구호활동차 비행기를 탔다 추락사고로 생을 달리한 클레멘테의 등번호 21을 달고 뛴다. 한국에서 활약하는 최고 용병 호세(롯데)도 그를 가장 존경한다. 클레멘테의 정신을 이어받아 ‘헐벗고 굶주린’ 조국의 청소년들. 20년 전 맨발에 글러브를 끼고 뛰던 자신처럼 야구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청소년들을 위해 많은 액수를 기부금으로 낸다. 미국은 새미 소사가 미국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봉사하길 원하지, 도미니카공화국을 위해 돈을 뿌리길 원치 않는다.
새미 소사는 라틴에게 돈 쓰지 말라?
홈런 경쟁을 하던 98년 소사는 같은 도미니카 출신의 상대팀 투수가 일부러 홈런을 ‘헌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다. 한화의 김정수가 기아 타이거스의 이종범에게 홈런을 맞았다면 같은 전라도 출신이라서 혹시 홈런을 일부러 맞아준 것 아니냐고 누가 기사를 썼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미국 매스컴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말해주는 해프닝이다. 소사는 맥과이어의 70홈런 달성 순간 바로 상대 덕아웃에 있었다. 소사는 곧바로 맥과이어에게 악수를 건넸다. 시즌 내내 경쟁을 치르고도 2인자로 밀려난 소사에게 부시스타디움의 맥과이어 팬들은 동정의 박수를 보냈다. 소사는 다음해인 99년 63홈런으로 ML 첫 2년 연속 60홈런 이상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나 다시 한번 맥과이어에게 홈런왕을 내줬다. 소사는 지난해 배리 본즈와 함께 홈런 경쟁을 벌이며 50홈런으로 생애 첫 홈런왕에 등극했으나 TV카메라는 맥과이어만큼 그를 비추지 않았다.
맥과이어의 최근 2년간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 자리를 배리 본즈와 새미 소사가 이어 받아 2년에 걸쳐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사회가 원하는 주인공이 빠졌다. 부상에서 회복한 맥과이어와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인 본즈, 도미니카의 그늘을 벗은 소사가 2002시즌에는 제대로 된 대결을 한번 벌여보길 꿈꾼다.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rough@sportstoday.co.kr

사진/ 캘리포니아 출신의 백인 맥과이어는 미국의 상징이다. 스포츠계는 그가 금지약물을 장기간 복용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는다.(AP 연합)
캘리포니아 포모나 출신의 백인 맥과이어는 미국의 상징이다. 떡 벌어진 어깨, 6피트5인치의 신장에 250파운드의 몸무게는 서부 개척시대의 광부를 연상케 한다. 공교롭게 맥과이어는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복장인 오버올(멜빵 바지)을 입고 자주 등장한다. 미국 낙농업협회의 우유 촉진 캠페인 광고(우유 한컵을 들고 수염에 밀크자국이 묻어나는)가 그러하다. 햄버거 ‘빅맥’은 그의 별명. 99년 그가 쏘아올린 공들은 미국야구의 인기 회복이자 동시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부권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계 화면을 지켜봤던 이들은 기억하겠지만 9월8일 시카고 컵스전서 70홈런을 때려낸 뒤 그는 배트보이인 아들 매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맥과이어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시절이던 88년 가을 아내 캐시와 이혼에 합의했다. 매튜가 아직 한참 어릴 때였다. 맥과이어는 87년 입단 당시 신인 50홈런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들 매튜의 출산을 보기 위해서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과 다 바꿀 수 있는 피붙이였다. 100만달러의 아동학대 방지기금을 사회에 출연하는 까닭도 아들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스타로서의 공인의식을 강조하는 미국 스포츠계는 맥과이어의 스토리를 높이 평가한다. 따라서 그가 안드로스틴다이온이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금지약물을 장기간 복용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는다.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장딴지 부상 탓에 출전이 뜸했지만 아직도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맥과이어의 경기를 보러 야구장을 가득 메운다. 37년 만에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기록을 깬 영웅에 대한 예우다. 아프로-아메리칸 배리 본즈는 야구 자체로만 따지면 불세출의 선수다. 피츠버그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바비 본즈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잘 뛰고, 잘 때리는 선수를 놓고 흔히들 호타준족이라 하는데 배리 본즈를 빼고는 사실, 아무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미국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400-400클럽(홈런 도루)에 가입했고, 그의 야구 경력이 좀더 이어진다면 500-500클럽 달성도 가능하다. 현재 개인 통산 558홈런으로 역대 통산 홈런에도 8위에 랭크돼 있다. 현재 뛰고 있는 현역 선수 중에서 만약 배리 본즈가 은퇴 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결코 구경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다. 앞서 밝혔지만 본즈는 야구 명문가 출신이다. 미국은 야구 자체가 대물림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러한 야구 가문 중에서 바비 본즈-배리 본즈는 가장 화려하다. 본즈의 아들 또한 피츠버그에서 프로 2년째를 맡고 있는 야구 3대 집안이다. 천재는 오만하게 마련이다. 거만하고 삐딱해도 천재라 용납해주는 경우가 많다. 본즈의 이런 에고이스트 기질은 종종 지적돼 왔다. 96년 40-40홈런 달성을 앞둔 상태에서 본즈는 “팀 동료들이 도대체 도와주질 않는다. 실력이 맞아야 함께 야구를 할 것 아닌가”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팀 동료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을지는 불보듯 뻔했다. 98년 유에스에이 투데이 발간 <베이스볼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아마도 은퇴할 때까지는 500-500클럽 달성이 힘들 것으로 보인다”며 동료들과의 어려운 관계,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 등에 대해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아내의 도움을 얻어 자세를 바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팬들, 많은 언론매체와의 접촉을 꺼리는 형편이다. 야구 명문가 본즈, 그러나 흑인

사진/ 기록 경신 가능서이 어느 때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베리 본즈의 홈런 행진이 여론을 몰고가지 못하는 이유는 매스컴과의 불편한 관계탓도 있다.(AP 연합)

사진/ 새미 소사는 고향의 대지진 때 구호활동차 비행기를 탔다 추락 사로로 생을 달리한 클레멘테의 등번호 21을 달고 뛴다.(AP 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