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기타는 착취의 도구가 아니다

정리해고 잔혹극으로 시작된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밴드의 유랑문화제 그들이 만든 기타로 연주해온 음악가들의 연대, 그리고 대한문 앞 난장

973
등록 : 2013-08-09 10:50 수정 : 2013-08-09 16:40

크게 작게

지난 7월31일 서울 홍익대 앞 클럽 ‘빵’에서 공연을 하는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 밴드. 해고된 뒤에 기타를 배운 이들의 유랑문화제는 연대하는 문화인들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명진
<글리>(Glee)는 잘 알려진 것처럼 합창 클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등학생들의 성장 스토리를 다룬 미국 드라마다. ‘글리 클럽’은 학생 합창단을 의미하는데, 이 드라마는 많은 부분이 대중음악을 매개로 하는 뮤지컬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글리>가 시즌별로 발매한 앨범은 그동안 2개의 플래티넘과 3개의 골드앨범을 기록하며 1200만 장이 판매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글리>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사이의 문제와 갈등이 음악적 소통을 통해 해결된다는 것이다. <글리>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와 갈등을 음악 대결, 배틀 형식을 띤 음악 공연을 통해 풀고자 한다.

내가 만든 기타 소리가 신기해

여기 <글리>가 보여주는 드라마 속의 이상과 낭만을 현실에서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이다. 물론 미국 드라마 속의 세계와 한국 사회의 현실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세계 기타 생산의 30%를 책임질 정도로 잘나가던 회사는 어느 날 갑자기 공장을 폐쇄하고 직원들에게 해고를 통지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오직 회사를 위해,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이며 이곳이 바로 ‘꿈의 공장’이라고 말씀하시는 사장님을 위해 장갑은 물론 방진마스크조차 빨아서 다시 쓰던 순박한 노동자들이었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드라마는 그렇게, <글리>와는 많이 다르게 뮤지컬 코미디가 아닌 ‘정리해고’라는 노동 잔혹극으로 시작되었다. 그날로부터 2364일이 지나고 있다. 거리농성, 공장 및 본사 점거, 분신, 송전탑 고공농성, 법정투쟁, 해외 원정투쟁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다 해보았고 대법원의 부당해고 판결까지 받아냈다. 하지만 회사로부터 돌아온 것은 또 한 번의 해고 통지뿐이었다. 어느새 세계적인 기타 장인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장기투쟁 사업장의 해고노동자가 되어 있었고, 부당한 해고에 불복종하는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참 신기하네, 내가 만든 기타가 실제 저런 소리를 낸다는 게. 젊은이들이 저렇게 멋있게 연주하고,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솔직히 처음 봐.”

2008년 가을, 서울 홍익대 앞 클럽 ‘빵’에서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을 위한 음악가들의 릴레이 콘서트가 열렸다. 오직 기타를 만드는 노동만이 삶의 전부였지만 음악이나 공연을 마주한 적이 없던 기타노동자들, 오직 음악을 만드는 작업이 삶의 전부이지만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에게는 관심이 없던 음악가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기타노동자들은 라이브 클럽이 낯설고, 밴드 공연이 부담스러워 콘서트 내내 거리를 서성거렸다. 하지만 자신들이 만든 기타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모습에, 음악가들을 통해 뿜어져나오는 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창문 하나 없이 먼지만 자욱한 공장이 아닌 무대 위에서 마주한 기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 순간부터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와 음악가들의 본격적인 애정 행각이 시작되었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은 <글리>의 주인공들처럼 음악의 힘을 믿기 시작했다. 음악과 노동이 공존하고 존중받는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지겹도록 만들기만 했지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기타를 직접 연주하기 시작했다.

인천과 서울 오가며 ‘유랑문화제’


그 결과 2012년 1월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밴드(이하 콜밴)를 결성했다. 시민들은 소셜펀딩을 통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에게 악기를 선물했고, 음악가들은 그들의 멘토가 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콜밴은 이제 전국 곳곳의 해고노동자, 사회적 약자 등을 찾아다니며 노래하고 연대한다.

지난 7월26일 저녁 서울 대한문 앞에서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로 전날 남대문경찰서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의 변호사 4명을 연행할 정도로 살벌한 그곳에서 때아닌 춤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이 서울과 인천을 돌아다니며 개최하고 있는 ‘유랑문화제’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대한문 앞을 찾은 것이다.

이제 제법 능숙한 무대 매너까지 자랑하는 콜밴은 다른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감동의 오프닝 무대를 선물했다. 그리고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과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는 음악가 ‘야마가타트윅스터’는 경찰의 교통통제용 장비를 고깔모자처럼 머리에 뒤집어쓰고 “돈만 아는 저질”이라는 노래 가사를 반복하며 댄스파티를 열었다. 야마가타트윅스터의 팬들을 비롯해 유랑문화제에 참여했던 시민들까지 흥에 겨워 동참했고, 순식간에 대한문 앞과 시청광장을 오가는 막춤 페스티벌이 벌어졌다. 지난 수개월 동안 대한문 앞 화단을 지키며 방석 하나, 피켓 하나 허용하지 않던 공권력도 음악의 힘, 막춤의 바다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글리> 속 한 장면처럼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와 음악인들은 대한문 앞을 음악과 춤으로 점령했다.

지금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과 음악·예술의 연대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홍대 앞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자립음악생산조합’은 8월11일 오후 4~10시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콜트 불바다-우리가 진짜 콜트다’라는 페스티벌을 준비 중이다. 두 개의 무대에서 야마가타트윅스터, 흐른, 회기동단편선, 빅베이비드라이버, 김목인,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등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에 대한 지지는 물론 콜트 기타 불매를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이번 페스티벌의 취지에 대해 “노동과 음악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콜트는 나쁜 기업”이라며 “그들이 생산하는 기타, 그리고 모든 생산물에 대해 불매할 것을 동료 음악가들과 시민들에게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를 위해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문제를 알리는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콜트 불바다’ 이어 연극 <햄릿>

요즘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은 연극 공연도 준비 중이다. 인문학 연구모임 ‘수유너머R’ 등에서 활동 중인 공연팀 ‘진동젤리’가 제안한 이번 연극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해 만드는 <햄릿>이다. 햄릿과 클로디어스를 비롯해 주연배우 대부분이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인데, 11월 첫 주에 서울 대학로의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연주와 연기가 <글리> 속 배우들보다 못하겠지만, 그 열정과 감동만큼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은 이제 자본으로부터 버려진 해고노동자의 삶이 아닌 음악과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의 주인공을 꿈꾸고 있다. 그들은 “기타는 착취를 위한 도구가 아니며 자유와 연대를 위한 악기”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다.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