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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간의 얼굴을 한 만화자본 시대

우리시대의 웹툰, <아이큐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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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1 18:14 수정 : 2013-08-07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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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어떤 놈이 교실에서 동을 떠서 100원씩 모았다. 암묵적으로 200원을 낸 놈이 소유권을 가지는 시스템이 정착됐다. 200원을 내 는 놈은 언제나 200원을 냈는데,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성공한 놈 이 분명했다. 대신 소지품 검사에 걸릴 위험부담은 200원을 낸 자본 가놈이 훨씬 크게 져야 했다. 우리 100원짜리 소액주주들은 출자금 만큼만 책임지는 유한책임회사 시스템이라고 설레발을 쳤다. 파산이 멀지 않았음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매주 발매되는 만화잡지 <아이큐점프>를 사기 위해 교실에 서 돈을 모았다. 요즘 말로 하면 크라우딩펀딩이 되겠다. 때가 되면 판매가격이 100원씩 올랐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1천원대 가격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열댓 놈이 100원씩 내고, 200원을 낸 놈이 마지 막 물권을 행사할 때까지, 주간만화잡지 <아이큐점프>는 교실 안을 돌고 돌았다. 100원을 내지 않은 나머지 40여 명도 만화책을 볼 수 있었다. 순서 는 조금 늦더라도 소외되지 않았다. 인 간의 얼굴을 한 만화자본의 시대, 아름 다운 시절, 벨 에포크였다.

창간호부터 실린 이현세의 <아마게돈> 은, 쓸데없이 심오했다. 어쨌든 <아이큐 점프>는 <드래곤볼>로 기억돼 마땅하다. 100원씩 추렴한 것도 사실은 <드래곤볼>을 보기 위함이었다. 우주 의 생명에너지를 야금야금 모아서 덩어리로 방출하는 무시무시한 기술 ‘원기옥’, 몸 안의 힘을 몇 배로 불려준다는 ‘계왕권’ 따위나 떠 들고 다녔지만 매주 <아이큐점프> 맨 뒤에 몇 장 붙어 있지도 않은 <드래곤볼>을 읽기 위해 돈 모아 기다렸다.

그러나, <아이큐점프>라는 제국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소년챔 프>가 창간됐고, <슬램덩크>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 프로농구 NBA 열풍이 불던 때였다. 이제 교실 안에는 거대 만화자본 두 개가 공존 했다. 독점은 독과점이 됐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만화자본의 시대였 다. <드래곤볼>이 ‘산왕고’라면, <슬램덩크>는 ‘북산고’였다. <아이큐점 프>와 <소년챔프>는 농구공 백패스처럼 선생님 몰래 1분단과 2분단 사이를 오갔다. 우리 시대의 웹툰이었다.

파산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만화계의 동렬이(<드래곤볼>)도, 종범이 (<슬램덩크>)도 떠났다. 만화대여점 시대가 활짝 열렸다. 수십만 부에 달하던 주간만화잡지 발행 부수가 뚝뚝 떨어졌다. 즐겨 보던 순정만 화잡지 <르네상스>도 어느덧 사라졌다.

아,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 즐겨 보던, 뭔가 세미프로 정도의 느낌 이 나던 19금 야한 잡지 <핫윈드>가 있었다. 얼마 전 부모님 집에 갔 더니 내 방에 쌓아둔 옛날 책들 사이에 <핫윈드>가 보였다. 참고서 팔던 학교 앞 서점 주인 아줌마는, <하이라이트>와 <최신수학> 사이 에 이걸 끼워서 줬다. 뒤적여보니, 추억은 돋는데 이건 뭐, 요즘 케이 블TV만도 못하네. 느낌이 없다.

김남일 <한겨레> 정치부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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