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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군자는 그 자체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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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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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부터 흥선대원군까지…최전성기의 주요작 모은 ‘선인들의 오랜 벗-사군자’전

사진/ 조희룡, <홍매 대련>. 19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조희룡은 화려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화풍으로 유명하며 특히 매화 그림에 빼어난 작가로 손꼽힌다.
흔히 말하는 ‘동양화’ 또는 ‘한국화’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뭘까.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으로는 사군자(四君子) 그림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묵죽이며 묵란 그림 하나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사군자 그림은 아직도 가장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군자는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기도 하다. 사군자 그림은 많아도 좋은 사군자 그림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해야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사군자를 접해 그림을 보면서 견문을 넓히고자 해도 사군자의 명품을 만날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전시회는 무척이나 드문 편이다.

일본에는 없는 우리 미술의 대표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031-320-1801∼2)에서 올 연말(12월30일)까지 열리는 ‘선인들의 오랜 벗-사군자’전은 모처럼 사군자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만한 좋은 기회다. 묵죽으로 유명한 탄은 이정부터 수운 유덕장과 추사 김정희, 우봉 조희룡 등 18∼19세기 화단의 거물들과 함께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운미 민영익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혜산 유숙의 <홍백매8곡병>(보물 1199호)이나 단원 김홍도의 <춘작희보>(보물 782호), 율곡 이이의 동생인 옥산 이우의 <묵란> 등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굵직한 그림들도 여럿이다.


사군자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성행한 그림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사대부의 품성을 닦고 표현하는 중요한 행위로 널리 퍼졌지만 일본에는 사군자 그림이 없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실제 일제시대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일본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조선미전을 만들었을 때에도 제국미전에는 없는 서예와 사군자부문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특히 사랑받은 장르다. 이런 점에서 사군자는 비록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우리 미술을 대표하는 그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회 지배계급이 그림을 전업 작가들에게만 맡겨놓지 않고 직접 창작하며 즐겼다는 점 역시 전세계적으로도 중국과 우리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18세기에 이르러 문인화의 정수로 전성기를 누린 사군자는 19세기 들어 창작 주체가 중인계급으로까지 퍼지면서 우봉 조희룡 등의 스타 작가들이 나타나 양적, 질적인 성장을 거둔다. 하지만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는 취미교실의 입문과정에서 배우는 기초과목 정도로 오해되며 화려했던 전통이 퇴색해버렸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 한국 미술계 최고의 논객으로 활동했던 평론가 근원 김용준은 “새로운 시대의 감각과 호흡과 감정이 느껴지는 새로운 양식”을 발견해야 한다고 작가들에게 요구하면서 “불행히 동방사상의 이해가 박약한 시대라 서(書)예술(서예와 사군자)의 운명이 그 후계자를 가지지 못함을 탄식할 뿐”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안타까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우리 사군자 그림 최전성기의 주요작을 한눈에 모두 볼 수 있는 알찬 기회다. 그러나 다른 전시회와 달리 사군자 전시회란 점에서 제대로 보려면 평소와는 다른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소재는 친숙해도 감상은 쉽지 않은 게 사군자이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과 동양문화에 대한 교양과 지식이 있어야만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군자 그림은 어떻게 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미술사학자 오주석씨는 “사군자는 그 자체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보면 된다”고 이끌어준다. 사군자라는 것이 옛 문인, 즉 사대부들이 스스로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실제로는 식물이 아닌 사람이며 사람에서도 덕이 많은 군자를 지향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감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싹이 돋는 대나무의 어린 순은 곧 될 성부른 어린아이이고, 예쁘고 낭창낭창한 묵죽은 소년이며 올곧고 마디가 굳은 대나무는 근본이 굳센 어른을 상징하는 식이다.

예쁘게 그려서 더 역겹다?

사진/ 김정희, <독향난무>. 난초그림은 추사 김정희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했다.
그래서 사군자 그림은 곧 그린 사람의 인품이 그대로 화품(畵品)이 된다는 점도 다른 그림과는 가장 구별되는 점이다. 그림이 곧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그렸느냐에 따라 그림의 품격도 달라지며, 그림을 감상하는 포인트도 달라진다. 친일파들에도 묵란을 그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작품 가운데에도 아주 예쁘게 잘 그린 그림들이 있지만 그것은 천한 그림이 되는 이치다. 예쁘게 그렸기 때문에 더욱 역겨운 것이 바로 사군자다.

최열 가나아트연구소장도 가장 중요한 감상의 맥으로 “작가에 대한 헤아림”을 든다. 사군자란 곧 사람이므로 대원군의 난초 그림과 민영익의 난초 그림이 같을 수 없고, 또한 감상 역시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우리 사군자 그림은 내적인 강함이 외적으로 드러나 호방하고 장중한 맛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전시장을 둘러본다면 사군자는 평소 보아오던 단순한 식물 그림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하나의 문화적 총체로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전시장을 둘러보다보면 전시장이 어두워 그림을 들여다보기 다소 편치 않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종이나 비단 그림이 특히 빛에 약하기 때문에 전시장 조도를 다른 전시회와는 달리 일부러 낮춘 것이기 때문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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