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이모가 조카를 데리고 가는데, 대책 없이 가 면 낭패다. 부모를 동반하지 않은 15살 미만의 한국인이 필리핀에 입국하려면, 부모의 영문 동의서가 있어야 한 다. 그것도 ‘가까운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아야 한 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도착해 3120페소(필리핀 화폐) 를 내야 입국 절차가 끝난다. 어학연수 비자를 받지 않고 들어와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 학생이 많아서 생긴 제도 라고 한다. 엄마와 함께 간다면? 성(姓)이 다르니까 영문 가족관계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방법이 있다. 2012 년 6월, 필리핀 세부에서 입국 심사를 받는데 옆줄에 있 던 여성이 남자애들과 함께 아무런 서류도 보여주지 않 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이상해 물었다. 그는 “여권 에 남편의 영문 이름을 적어두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알아야 국경도 넘는다. 한국 사람들이 오죽했으면 저런 제도가 생겼을까 싶지만, 조카에게 아름다운 필리핀 바 다를 보여주고 싶은 경향 각지의 이모삼촌들, 이런 장벽 앞에서 기가 죽는다. 입국 비자에 얽힌 이런 경험담도 있다. 입국하려면 전 자여행허가서(ETA)를 받아야 하는 나라가 있는데, 인 터넷으로 신청해 받으면 조금 싸고, 공항에 도착해 받으 면 30달러를 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지인과 함께 그 나 라에 갔다. 그 나라를 잘 아는 지인은 공항에서 ETA를 받으러 가려는 사람을 막았다. 그냥 입국 심사를 받자고 했다.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권 사이 에 10달러 지폐를 슬쩍 넣어주었다. 그들의 순서가 됐는 데, 금방 입국이 끝났다. 나중에 지인은 “그 출입국 직원 이 ‘다음에 오면 꼭 자기를 찾으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렇게 가난이 부른 풍경은 국경에서 시작된다. 여행자에 대한 배려로 출입국 도장을 여권에 찍지 않 는 나라도 있다.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가려면, 반드시 이 스라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집트 타바를 출발한 여행자 들은 국경에서 출국세를 내고 이집트를 떠난다. 한참을 걸어가면 이스라엘 에일라트 초소에 이른다. 2002년 이 곳을 지난 사람들에 바탕하면, 이스라엘 출입국사무소 는 여권에 이스라엘 도장을 찍지 않고 그냥 입국 종이를 준다. 이스라엘 도장이 여권에 있으면 입국을 거부하는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이 다른 종이에 찍어달 라고 하소연해서 생긴 변화다. 이렇게 입국해 택시를 타 고 한참을 가면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에 이른다. 이스 라엘에서 출국세를 내고 다시 공동경비구역을 걸으면 드 디어 요르단 국경 초소가 나온다. 한국을 가기 위해 온 라오스 국경 전쟁의 세기, 나치에 쫓겨 독일을 떠나 “구두보다 나 라를 더 자주 바꿔가며” 떠돌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 은 시인도 있었다. 그는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친구 발 터 베냐민 등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썼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 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오랜 세월 이 지났지만,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이들이 있다. 인터넷 여행자 커뮤니티 ‘태사랑’에는 탈북자를 만났 다는 이야기가 있다. 메콩강이 가까운 라오스나 타이 북 부는 탈북 루트다. 이곳을 여행하다 중국에서 넘어온 탈 북자를 만나는 일도 생긴다. 가끔은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사람도 있다. 환갑을 기념해 배낭여행을 떠난 부부 의 2008년 라오스 경험담이다. “루앙남타에서는 말로만 들었던 탈북자 가족과 만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길 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데 청년 하나가 들어와 주인에게 무언가를 묻는데 주인 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뒤 그 청년 이 다시 오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와서는 한국어로 혹시 한국분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제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그 사람은 탈북자 아내를 둔 조선족 남편이 었다. 중국에 살던 부부는 신분이 불안해 살기가 어려웠 다. 부부는 아내가 한국으로 가면 가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내는 한국에 입국할 길이 있는 타이로 가려다 라오스 국경에서 이민국에 붙잡혔다. 남 편은 아내를 구금하고 있는 라오스 이민국 직원의 이름 도 몰랐다. 오직 전화번호만 알고 있었지만, 당시 전화마 저 불통이었다. 애타게 아내의 행방을 찾았지만, 중국어 가 통하지 않아 애끓는 남편을 부부가 도왔다. 함께 라 오스 이민국을 찾아헤매 결국 아내의 소재를 알게 됐다. 그들의 이야기는 “일이 잘되기를 빌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서도 아내는 그 청년의 속이 새카맣게 탔을 텐데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먹여 보낼 걸 그랬다고 안타까워 하더군요”라고 끝난다. 불법체류 단속에 걸린 이주민 언젠가, 인천공항에서 방콕행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 입구 앞에서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마치 조회를 하듯이 줄을 맞춰 늘어선 30~40명 사람들 의 손이 부자유스러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 만 그들의 체념한 눈빛은 아직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들 은 한눈에 보기에도 추방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불법체 류 단속에 걸린 이주민임이 분명했다. 사열종대로 늘어 선 그들 앞에는 경찰이 있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 지만, 이렇게 처지가 달랐다. 누군가에겐 너무 쉽고, 누 군가에겐 ‘넘사벽’인 곳, 여기가 국경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필리핀에 이모가 조카를 데리고 가는데, 대책 없이 가 면 낭패다. 부모를 동반하지 않은 15살 미만의 한국인이 필리핀에 입국하려면, 부모의 영문 동의서가 있어야 한 다. 그것도 ‘가까운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아야 한 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도착해 3120페소(필리핀 화폐) 를 내야 입국 절차가 끝난다. 어학연수 비자를 받지 않고 들어와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 학생이 많아서 생긴 제도 라고 한다. 엄마와 함께 간다면? 성(姓)이 다르니까 영문 가족관계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방법이 있다. 2012 년 6월, 필리핀 세부에서 입국 심사를 받는데 옆줄에 있 던 여성이 남자애들과 함께 아무런 서류도 보여주지 않 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이상해 물었다. 그는 “여권 에 남편의 영문 이름을 적어두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알아야 국경도 넘는다. 한국 사람들이 오죽했으면 저런 제도가 생겼을까 싶지만, 조카에게 아름다운 필리핀 바 다를 보여주고 싶은 경향 각지의 이모삼촌들, 이런 장벽 앞에서 기가 죽는다. 입국 비자에 얽힌 이런 경험담도 있다. 입국하려면 전 자여행허가서(ETA)를 받아야 하는 나라가 있는데, 인 터넷으로 신청해 받으면 조금 싸고, 공항에 도착해 받으 면 30달러를 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지인과 함께 그 나 라에 갔다. 그 나라를 잘 아는 지인은 공항에서 ETA를 받으러 가려는 사람을 막았다. 그냥 입국 심사를 받자고 했다.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권 사이 에 10달러 지폐를 슬쩍 넣어주었다. 그들의 순서가 됐는 데, 금방 입국이 끝났다. 나중에 지인은 “그 출입국 직원 이 ‘다음에 오면 꼭 자기를 찾으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렇게 가난이 부른 풍경은 국경에서 시작된다. 여행자에 대한 배려로 출입국 도장을 여권에 찍지 않 는 나라도 있다.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가려면, 반드시 이 스라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집트 타바를 출발한 여행자 들은 국경에서 출국세를 내고 이집트를 떠난다. 한참을 걸어가면 이스라엘 에일라트 초소에 이른다. 2002년 이 곳을 지난 사람들에 바탕하면, 이스라엘 출입국사무소 는 여권에 이스라엘 도장을 찍지 않고 그냥 입국 종이를 준다. 이스라엘 도장이 여권에 있으면 입국을 거부하는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이 다른 종이에 찍어달 라고 하소연해서 생긴 변화다. 이렇게 입국해 택시를 타 고 한참을 가면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에 이른다. 이스 라엘에서 출국세를 내고 다시 공동경비구역을 걸으면 드 디어 요르단 국경 초소가 나온다. 한국을 가기 위해 온 라오스 국경 전쟁의 세기, 나치에 쫓겨 독일을 떠나 “구두보다 나 라를 더 자주 바꿔가며” 떠돌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 은 시인도 있었다. 그는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친구 발 터 베냐민 등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썼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 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오랜 세월 이 지났지만,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이들이 있다. 인터넷 여행자 커뮤니티 ‘태사랑’에는 탈북자를 만났 다는 이야기가 있다. 메콩강이 가까운 라오스나 타이 북 부는 탈북 루트다. 이곳을 여행하다 중국에서 넘어온 탈 북자를 만나는 일도 생긴다. 가끔은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사람도 있다. 환갑을 기념해 배낭여행을 떠난 부부 의 2008년 라오스 경험담이다. “루앙남타에서는 말로만 들었던 탈북자 가족과 만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길 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데 청년 하나가 들어와 주인에게 무언가를 묻는데 주인 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뒤 그 청년 이 다시 오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와서는 한국어로 혹시 한국분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제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그 사람은 탈북자 아내를 둔 조선족 남편이 었다. 중국에 살던 부부는 신분이 불안해 살기가 어려웠 다. 부부는 아내가 한국으로 가면 가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내는 한국에 입국할 길이 있는 타이로 가려다 라오스 국경에서 이민국에 붙잡혔다. 남 편은 아내를 구금하고 있는 라오스 이민국 직원의 이름 도 몰랐다. 오직 전화번호만 알고 있었지만, 당시 전화마 저 불통이었다. 애타게 아내의 행방을 찾았지만, 중국어 가 통하지 않아 애끓는 남편을 부부가 도왔다. 함께 라 오스 이민국을 찾아헤매 결국 아내의 소재를 알게 됐다. 그들의 이야기는 “일이 잘되기를 빌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서도 아내는 그 청년의 속이 새카맣게 탔을 텐데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먹여 보낼 걸 그랬다고 안타까워 하더군요”라고 끝난다. 불법체류 단속에 걸린 이주민 언젠가, 인천공항에서 방콕행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 입구 앞에서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마치 조회를 하듯이 줄을 맞춰 늘어선 30~40명 사람들 의 손이 부자유스러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 만 그들의 체념한 눈빛은 아직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들 은 한눈에 보기에도 추방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불법체 류 단속에 걸린 이주민임이 분명했다. 사열종대로 늘어 선 그들 앞에는 경찰이 있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 지만, 이렇게 처지가 달랐다. 누군가에겐 너무 쉽고, 누 군가에겐 ‘넘사벽’인 곳, 여기가 국경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