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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결초보은 좋아하시네

‘풀과 함께 살아가기’ 첫 번째 이야기… 관용과 박멸 극단적 심리상태 오가다 선택한 ‘제3의 길’은 구획 나누기와 집중 관리, 풀을 길들이는 정말로 훌륭한 방법 ‘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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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8 14:5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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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살다 시골로 와서 가장 행복한 때를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퇴근 뒤의 30분을 꼽으련다. 차단기고 주차요원이고 뭐고 하나 없는 주차장에 나 홀로 차를 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텃밭에서 잡초를 솎아내다보면 무념무상이 따로 없다. 4년 전 5월23일 아침 부엉이바위로 가기 전 문 밖에서 잡초를 뽑았다던 인간 노무현의 심사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럴 때면 “잡초는 단지 우리가 원치 않는 장소에서 자라는 식물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는 현학적 사유를 불평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대개 딱 거기까지다. 뻐꾸기 울고 희디흰 이팝나무 꽃이 지는 모내기철이 시작되는 이맘때면 슬슬 걱정이 시작돼 장마 지고 푹푹 찌는 한여름, 돌아서면 자라는 풀들에 한숨과 짜증이 나를 압도한다. ‘결초보은(結草報恩) 좋아하시네. 풀이 엉키면 걸려 넘어지기나 하지 은혜는 웬 은혜여!’

땅이 드러난 밭에 자연친화적인 것은 모두 모아 덮어준다. 자주 덮어주면 질긴 풀들의 기가 죽는다. 강명구 제공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풀에 대한 관용과 박멸의 극단적 심리상태를 오가다 내가 한 선택은 ‘제3의 길’이었다. 제초제를 통한 박멸 작전은 애당초 논외였고 두고 보는 것은 수양이 부족해 참기 힘들어 “그래, 너 살 곳에 너 살고 나 살 곳에 나 살자”는 공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다만 너 살 곳과 내 살 곳의 구분은 풀이 아닌 내가 하기에 약간의 독재적 요소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대단한 관용이었다. 이번호와 다음호에는 이런 나의 선택을 소개한다.

지금껏 내가 깨달은 풀과의 공생법 특순위는 도를 닦는 것이고, 이것이 어려우면 구획 나누기와 집중 관리가 일순위다. 풀의 영역과 약간의 특권을 가진 또 다른 생명체로서 나의 영역을 구분해 저들의 영역은 ‘그래 네 맘대로 하여라’지만 내 영역에는 ‘들어오면 가만 안 둔다’는 경고를 발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농구로 치면 ‘올 코트 프레싱’이 아니라 ‘존 디펜스’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제 분수를 알아 관리 능력 밖의 영역은 과감히 풀에게 양보해야 한다. 물론 당신의 풀 관리 능력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일취월장한다면 당신은 더 많은 텃밭과 더 많은 노동을 즐기는 행운과 고뇌를 동시에 누리게 될 것이다. 전문 농사꾼이 아닌 내가 이 방법으로 관리 가능한 범주는 자신은 없지만 200~300평 정도랄까?

다음으로 소개할 방법은 내 영역의 밭은 무조건 덮어주는 것이다. 서양말로 ‘멀칭’(Mulching)이라고 하는데 이거 힘들어서 그렇지 정말로 훌륭하다. 나의 멀칭 방법은 검은 비닐 빼고 자연친화적인 것은 모두 모아(말려)서 식물들 사이에 덮어주는 것이다. 왕겨, 뿌리째 뽑아 말린 잡초, 잔디 깎아 말린 것, 낙엽 부순 것, 나뭇잎, 옥수수 대궁, 볏짚, 건초, 먹다 남은 상춧잎에 배추 시래기까지 모두 대환영이다. 단 미관을 고려해 가지런하게 골고루 덮어주는 센스는 필요하다. 물론 덮어준다고 풀이 스스로 물러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얘들이 얼마나 질긴데! 하지만 자주 많이 덮어주면 풀이 순해진다. 웃자라기도 하거니와 덮어준 땅은 부드럽기 이루 말할 수 없어 아무런 연장 없이도 식은 죽 먹기로 뽑힌다. 아, 그때 딸려 나오는 저 풀들의 잘 퍼진 잔뿌리와 잔뿌리에 걸린 검은 흙덩이의 아름다움이란! 80대 중반인 아버지가 이름하여 ‘숙전’(熟田)이라 부르시는 ‘잘 익은’ 밭의 소유주인 내가 자랑스러워진다. 여기까지만 와도 당신은 풀과 공생하기의 반은 성공한 셈이다. 마지막 우문현답 하나. ‘얼마나 덮어줘야 합니까?’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니 실은 답이 없다는 말이다.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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