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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조금씩 더 ‘못된 여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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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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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고 난 한국 브리짓 존스 3명의 쾌도난담

서른두살이 되면서 그녀는 결심한다. 술 끊기. 담배 끊기. 몸무게 줄이기. 그러나 매일 기록되는 그녀의 담배 개비 수는 40개를 육박하고, 빈 술병의 개수와 몸무게 또한 변동이 없다. 직장생활? 엉덩이 사이에 낀 팬티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영되는 실수만 아니면 ‘오늘도 무사히’다. 결혼? 친척들이 다 모여 측은한 눈길의 꽃다발을 보내는 집안의 행사는 그의 스트레스 1호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결혼 적령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는 평범한 직장여성인 브리짓 존스의 일상을 그린 로맨틱코미디다.

어떤 이들에게 이 영화의 코미디는 코미디로만 보이지 않고, 로맨스는 로맨스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는 직장여성들, 한국의 브리짓 존스들이다. 엉덩이에 낀 팬티가 전국에 방영되는 불행한 사태를 겪은 적은 없지만 그들은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꼬인 것일까?” “너는 충분히 능력있어”라는 주변의 격려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여유있게 기다리면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라는 친구들의 말에 갑자기 눈초리가 올라간다. 수많은 브리짓 존스들은 크건 작건 이러한 경험에 연루돼 있다.

정희정(30, 이하 정), 이청순(29, 이하 이)씨도 그런 한국의 브리짓 존스들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21>의 김은형 기자(29, 이하 김), 본인도 예외는 아니다. 직장생활 5, 6년차. 미혼. 안정된 직장에 딸린 식구도 없고. 무슨 고민이 있겠냐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고 함께 만난 세명의 브리짓 존스들의 이야기는 세 시간이 지나도 ‘to be continued’였다.

김: 영화 첫 장면이 집안 친척들 다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잖아요. 거기서 남자 잡으라고 하는 엄마의 성화에, 친척들 눈총에 스트레스 팍팍 받고. 남 얘기 같지 않더라고요. 두 사람은 명절이나 집안행사 참석해요?


이: 절대 안 가죠. 바쁘다는 핑계로.

정: 친척 어른들 만나면 꼭 만나는 남자 없냐, 언제 결혼할 거냐, 거의 고문 수준의 질문을 받잖아요.

김: 특히 안 가는 건 결혼식. 마감있는 직업이 그래서 좋아요. 마감 핑계대면 모든 게 해결되거든.

이: 사정도 모르고 엄마는 매일 왜 그렇게 바쁘니, 너무 힘들면 그만둬라 하시죠. (웃음)

친척 어르신들의 말씀, 거의 고문 수준

김: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재미있는 건 크리스마스 해프닝처럼 똑같지는 않지만 장면마다 비슷한 경험들을 연관시킬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어땠어요?

이: 내가 가장 끔찍했던 건 커플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장면이었어요. 나도 그런 경험있는데 그럴 때 꼭 내 자리는 호스트석이잖아. 브리짓 존스처럼. 그리고 기혼으로서의 연대감 같은 게 형성되는 거야. 자기들끼리 실컷 떠들고 마치 배려한다는 눈초리로 너는 언제 결혼하니? 정말 남자친구 없어?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정말 속이 끓지. 화를 낼 수도 없고.

정: 브리짓 존스의 친구들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전화하면 바로 달려나와서 의지가 돼주는 친구들, 참 부럽더라고요. 결혼 안 한 여자들의 공통점이 비슷한 친구들이 많다는 건데 난 예외인 것 같아.

김: 그게 정상 아니에요? 시간이 있어야 친구들을 만나지. 정신없이 일하면서 몇년 지나니까 친구들도 점점 떨어져나가. 심심할 때 휴대폰 들고 누구한테 걸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려놓은 경험없어요? 특히 주말에.

정: 언젠가는 휴일날 음악회표를 들고 친구들한테 전화 돌렸는데 다들 바쁘다는 거야. 나중에는 내 참 더러워서, 혼자 보고 만다 그러고 말았지, 뭐.

김: 세수도 안 하고 침대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그냥 휴일 종치는 거죠. 오른쪽으로 한번 누웠다, 왼쪽으로 한번 뒤집었다가 하면서.

이: 그래도 나는 싱글 친구들이 많은 편이에요.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결혼하고 나니까 그 전에는 별로 안 친했던 친구들이 솔로 그룹으로 모이는 거야. 브리짓 존스만큼은 아니지만 급하게 찾을 때 뛰어올 만한 친구도 있는 것 같고.

정: 독신으로 살려면 남자친구 3명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옛날에는 술친구하는 남자친구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어. 두 사람은 속편히 이야기할 남자친구 있어요?

김: 한명 있어요. 게이. 남자친구들은 결혼하면 여자친구들보다 만나기 더 힘들잖아요. 걔랑 가끔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러 가고 그래. 요즘에는 인생 더 한심해지면 만인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 결혼하자, 정략결혼, 그런 약속도 했어요. (웃음)

정: 나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김·이: (거의 동시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꼭 먼저 결혼하더라.

정: 지난 5월에 남동생이 결혼했어요. 그런데 결혼 전에 엄마가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네가 올해 안에만 가면 동생 결혼을 미루겠다고. 제가 대답을 안 하니까 엄마는 점까지 보러 갔어요. 그런데 점쟁이가 동생 먼저 보내라고 해서 겨우 넘어갔지. 나 하나만 마음 바꿔먹는다고 이해되지 않는 게 결혼이잖아요. 스트레스받지.

2주에 한번씩 소개팅을 했더니…

사진/ 금주, 금연, 다이어트, 새해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이: 저도 장녀거든요. 아빠는 동창회 다녀오시면 외투 막 내던지면서 누구 딸은 어릴 때 너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판사한테 시집갔다더라 이런 말씀하시고, 엄마는 해외여행 보내주고 호강시켜주는 거 다 필요없다, 결혼만 해라 이러고, 이렇게 실랑이 벌이느니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브리짓 존스가 아무리 스트레스받는다 한들 한국에서만 하겠어요?

정: 엄마들은 비교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친척 중에 또래가 셋 있는데, 다 결혼을 했어요. 그것도 흔히 말하는 괜찮은 신랑감하고. 직장생활이라도 안 했으면 그 압력을 견뎌내기도 힘들었을 거야.

이: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 결혼해도 행복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잖아. 그러니까 안 하고 싶을 때도 있어.

김: 맞아. 같이 술마시다가 집에서 전화오면 일하고 있다고 거짓말하는 선배들 보면, 결혼하면 나도 저렇게 속고 살겠지 하는 생각도 들어. 나이들수록 결혼의 안 좋은 모습도 많이 보니까 더 결혼을 결정하기 힘든 것 같아. 그리고 이 나이에 남자 만나서 “너라면 함께 배추장사도 할 수 있어” 이런 생각 안 들잖아.

이: 지난해 가을에는 정말 불안하더라고. 그래서 2주에 한번씩 소개팅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누가 누구였는지 헷갈리는 지경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만났는데 막 엉뚱한 이야기하고, 잘될 리가 있겠어?

김: 서른이 되니까 오히려 조급증은 사라지는 것 같아. 커플들이 다니는 걸 봐도, 그냥 그런가보다. 얼마 전에 극장을 갔는데, 두 커플이 앉아서 영화를 보더라고. 나는 극장 손잡이 두개 올리고 누워서 봤잖아. 극장에 손잡이 올라가는 커플석이 생기니까 편해지는 게 있긴 있더라고. (웃음)

가끔씩 결혼하는 꿈, 그건 악몽

정: 다른 맥락이지만 서른이 되니까 나도 좀 변한 것 같아요. 내 태도의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다는 생각도 들어. 빨리 결혼할 생각도 없어지고.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가끔씩 결혼하는 꿈을 꿔요. 결혼식을 하면서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한마디로 악몽이지.

이: 나는 아는 사람마다 묻고 다녀요. 내가 뭐가 문제냐, 왜 남자가 없다고 생각하냐, 한 선배가 제발 남의 말 좀 들으래. 그래서 선보러 나가면서 결심했지. 경청을 하자. 그런데 이 아저씨가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혼자서 떠드는 거야. 죽음의 경청이었지. (웃음)

김: 다시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어차피 상업영화니까 그렇겠지만, 정말 깨는 건 결론이야. 온갖 주접 다 떨고 다녀도, 있는 그대로 좋다잖아. 잘생기고, 키크고, 심지어 잘 나가는 인권변호사가 말이야. 그런 왕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 그럴 수도 있겠지. 찾아보면 말이야.

김: 언니, 한 5년 더 기다려야 정신차리겠다. (웃음)

이: 그런데 정말 결혼은 현실인 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내 친구가 결혼중매업체를 찾아갔대. 상담자가 다 도와드린다, 성혼율이 80%다 하면서 유보조건을 몇 가지 내거는데, 필(feel)을 믿는 사람은 안 돼요. 그러더래. 그런데 나는 그걸 아직 믿거든.

김: 청순씨도 한 3년 더 묵어야겠네. (웃음) 얼마 전에 내 후배도 ‘기자가 뛰어든 세상’에서 커플매니저를 한 적이 있거든. 그래서 내가 “나도 한번 가입해볼까?” 했더니, 나한테 맞는 그룹이 있대. 새로운 출발인가, 뭔가 하는 재혼 그룹. 나는 나이가 많아서 초혼 그룹에는 가입할 수 없다는 거야.

정: 난 영화에서 가장 통쾌했던 장면이 브리짓 존스가 회사를 나갈 때였어. 사람들 앞에서 “당신 밑에서 일하느니, 사담 후세인 밑에서 일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사실 일이 생활의 중심이고 밥줄인데 위에서 못살게 구는 사람 있으면 너무 괴롭잖아. 그때 그 사람을 뻥 차고 나오는 게 정말 엑소더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 맞아. 바람둥이 남자주인공이 아니라고 해도 같이 일하기 괴로운 사람들 꼭 있잖아. 브리짓 존스의 직속상사처럼. 그런데 문제는 아예 회사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싸우기가 너무 힘들다는 거야.

이: 분노하면 많은 사람들이 히스테리라고 그러지.

김: 특히 남자들이.

착한 여자되는 법만 배웠다

이: <날마다 조금씩 못된 여자가 되는 법>이라는 책도 있잖아요. 정말 나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몇년 공주처럼, 동생처럼 귀여움받다가 직장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죠.

김: 옛날에는 처세술 책 같은 거 왜 보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이: 이제 줄치면서 읽잖아요. 글귀를 써서 책상 위에 붙여놓고. (웃음)

김: 그런 책에는 얄팍한 사기술도 많지만, 정말 도움되는 말도 많아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부려먹는가 이런 내용의 책이 있었어요. 유형별로, 주변 사람들이 다 떠오르더라고.

정: 사람좋다는 말은 직장생활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맘좋은 동료, 착한 후배로 칭찬받다가도 한번 잘못하면 그런 평가는 와르르 무너지거든요. 조금 못돼도 날 위해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 많은 여자들이 나 같은 고민을 겪을 것 같은데, 문제는 싸우는 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착한 여자되는 법만 배워서 거절하는 법, 항의하는 법을 잘 모르는 거야. 결국 하녀처럼 일만 하게 되는 거지.

이: 정말 거절하는 법도 연습이 필요해요. 직장생활 초기에는 모든 면에서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마음고생만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제 나는 좀 그게 되는 것 같아요. ‘노’를 많이 할수록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어.

김: 그런데 책으로 나오는 여성 성공담들은 오히려 판타지소설 같다는 생각도 들어. 처음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다들 그런 꿈을 꾸지, 억대 연봉, CEO, 비즈니스 클래스…. 그런데 한 5년 지나면 그런 꿈이 다 판타지라는 걸 깨닫게 되죠.

이: 직장생활 5년 하고 나서도 사장이나 간부를 꿈꾸는 여자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정: 여자들이 부장되고 간부되는 거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들어요. 정말 대단한 노력가구나 하는 동시에, 또 얼마나 더러운 꼴을 많이 봤을까 싶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이런 걸 저울 재다 보면 과연 성공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 내 여자 동료는 만날 ‘전 여성의 미래가 자기 어깨에 걸려 있다’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데,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게 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같아. 내가 즐거워야 전 여성의 미래를 어깨에 걸든지 말든지 하지.

이: 난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모자라고 못나서 인생이 안 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도 충분히 괜찮은 직장인, 싱글 여성이라는 생각.

정: 직장을 때려치울 때는 멋지게 때려치워야지. 우리도 브리짓 존스만큼 괜찮은 여자잖아. 아닌가? (웃음)

김은형 한겨레21 기자

기사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홀딱쇼도 과감하게 감행하는 진정한 프로페셔널(?). 집에 들어가서는 "내가 미쳤지, 왜 이 아이디어를 냈을까?" 100만 독자에게 보여질 망신살에 벽지를 뜯으며 잠 못 이룬 진정한 소심녀. 밤새도록 대담기사를 만지작거리면서 공포에 떨다가 "괜찮은데" 라는 동료의 '의례적' 멘트에 다시 의기충전하는 하드코어 단순함.

정희정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직업과 직장을 동시에 바꾸는 엑소더스를 통해 꿈꾸던 일을 하게 됐으나 희의에 빠져 요즘엔 백수를 꿈꾸고 있다. 천성이 느긋한 건지 게으른 건지 천천히 살고 싶어하지만 시초를 다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커홀릭 기질이 다분해 죽어라 일하다가 가끔씩 내가 왜 이렇게 사나 하며 자괴감에 빠진다. 심리상태의 특징은 자신감과 열등감을 수시로 오간다는 점.

이청순 코스모폴리탄 패션담당 기자

패션잡지 읽는 것을 좋아해 잡지사 기자가 된 지 올해로 5년이 된 즐거운 싱글. 가끔은 아주 심란해지기도 하는 싱글. 화보를 찍느라 화장품이며, 옷가지를 보따리장수처럼 싸들고 다녀도 즐겁지만 대구에 계시는 부모님의 결혼성화 전화를 받을 때면 식은땀을 흘리는 바른생활 장녀.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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