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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월드컵 본선의 감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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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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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강호 예선서 침몰한 이변의 역사… 브라질도 네덜란드에 이어 재물이 될 건가

사진/ 예선탈락이 확정된 네덜란드의 스트라이커 피에르 반 후이동크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AP 연합)
막판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2002년 한·일월드컵 대륙예선에선 전통의 강호인 네덜란드가 예선탈락하고, 독일과 브라질은 각각 숙적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에 충격패를 당해 본선행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에 몰려 지구촌 축구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세계정상권이라고 자부하던 강호들이 침몰하거나 좌초 위기에 처한 것만으로도 월드컵 본선 32강 도전이 얼마만큼 험난한 길인지를 알 수 있다. 이변과 파란이 있어 지역예선은 흥미가 더해가지만 정작 세계강팀들과 즐비한 월드스타들이 빠진 본선잔치는 아무래도 맥이 빠질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공동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은 물론 국제축구연맹(FIFA)도 흥행면에서 강호들의 예선탈락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월드컵 4강 네덜란드의 탈락


사진/ 독일(붉은 유니폼)은 홈경기서 잉글랜드에 완패해 탈락 위기에 놓였다.(AP 연합)
그중에서도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의 탈락은 팀당 1경기씩만 남겨놓은 유럽예선에서 가장 큰 이변. 지난 1일 유럽예선 2조 더블린 원정경기에서 1명이 퇴장당한 아일랜드를 상대로 루이스 반 갈 감독은 스트라이커 4명을 최전방에 대거투입해 “공격 또 공격”을 외쳐댔지만 0-1으로 완패했다. 4일 뒤 네덜란드는 에스토니아에 5-0으로 화풀이해 봤지만 포르투갈이 승리를 추가하는 바람에 5승2무2패 조3위로 플레이오프 진출권에서도 밀려나 예선탈락이 확정됐다.

현재 한국대표팀 사령탑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98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올려놓은 네덜란드는 16년 만에 본선무대에 초대받지 못한 채 구경꾼으로 전락한 것이다. 베르캄프가 은퇴한 뒤 공격의 조율사를 맡아오던 다비즈가 약물복용으로 징계를 받아 아일랜드전에 결장한 게 치명타였지만 ‘토털축구의 원조’답지 못한 무기력한 경기내용을 보여줘 자멸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최다 4회 우승으로 월드컵 본선통산랭킹 1위인 브라질은 남미예선에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 자칫하면 유일한 월드컵 전 대회 본선출전의 대기록이 17회 대회에서 끝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지역예선에서 불패의 팀으로 명성을 이어오다가 94월드컵 예선서 4000m 고원의 라파스에서 벌어진 볼리비아 원정경기에서 0-2로 첫 패를 당한 게 브라질 축구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그때는 산소가 부족해 졌다는 변명이라도 통해 홈경기는 일부러 아마존강의 열대기후에서 치러 더위에 약한 볼리비아에 6-0으로 분풀이했지만 이번에는 명예도 자존심도 모두 실종된 만친창이 예선을 힘겹게 치르고 있다.

페루, 파라과이, 칠레, 에콰도르에 돌아가면서 패하더니 지난 5일에는 이미 본선행이 확정된 아르헨티나에 자책골까지 기록하며 1-2 패로 자멸, 이번 예선 들어서만 5패를 기록했으니 이제 ‘브라질의 위기’라는 기사는 외신들의 단골메뉴가 돼버렸다. 아르헨티나전에 앞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브라질 국민의 25%가 본선에 못 나갈 것이라고 비관할 정도. 사령탑을 4명씩이나 갈아치우는 충격처방에도 불구하고 ‘춤추는 법을 잊어버린 삼바군단’이라는 힐난까지 받고 있다. 현재 우루과이와 똑같이 7승3무5패를 기록해 골득실차로 겨우 4위에 턱걸이해 있지만 자칫 5위로 떨어져 오스트레일리아와의 플레이오프로 밀려날 공산도 높다.

지금이야 아르헨티나가 남미에서 가장 먼저 본선티켓을 따냈지만, 8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현재 브라질보다 더 깊은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플레이오프로 밀려나 은퇴했던 마라도나가 보다 못해 대표팀에 복귀해서야 1승1무로 가까스로 본선행 막차를 탈 수 있었다.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와 플레이오프 치를 수도

사진/ 이변이 있어 즐거운 월드컵.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은 본선행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AP 연합)
이처럼 월드컵 지역예선에선 강호들의 수난사가 적지 않았다. 지역예선이 시작된 34년 이탈리아월드컵부터 전 대회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강호가 다음 대회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대이변의 충격은 이번의 네덜란드를 포함해 모두 15차례나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30년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원년 우승을 차지한 우루과이가 유럽팀의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2회 대회 출전을 포기한 것과 34년 4강팀 오스트리아가 38년 월드컵 직전 독일에 합병되는 바람에 출전이 무산된 사례만 예외일 뿐이다.

30년 대회 4강에 올랐던 유고가 34, 38년 예선에서 잇따라 탈락한 것으로 시작된 대이변의 파노라마 중에서 가장 큰 희생양은 아마도 프랑스가 아닐까. 플라티니와 ‘예술축구’를 앞세워 86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했던 프랑스는 90, 94년 대회 예선에서 연속 분루를 삼켰다. 90년 대회 유럽예선 5조에서 유고, 스코틀랜드에 이어 3위로 밀려나 조별로 두장이 주어진 본선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98년 월드컵 개최가 확정된 뒤에 맞은 94년 대회 예선에 비하면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다.

93년 11월17일, 유럽예선 6조 최종전. 그것도 프랑스의 파리 홈경기. 불가리아와 비기기만 해도 본선티켓을 거머쥐게 되는 절호의 찬스였다. 1-1로 거의 승부가 마감되려던 종료 10초 전 코스타디노프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맞고는 준비된 샴페인을 던져버려야 했다. 마지막날 극적으로 조 2위로 뒤집기에 성공한 불가리아는 그 여세를 살려 본선 출전 32년 만에 첫 승을 신고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불가리아의 악연은 62년 대회 예선에서 비롯됐다. 두 나라는 예선 2조에서 나란히 3승1무로 동률이 됐다. 지금의 방식이라면 골득실차로 1위가 됐겠지만 당시에는 무조건 승점이 같으면 재경기를 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제3국인 이탈리아에서 치른 단판승부에서 0-1로 분패해 불가리아의 월드컵 첫 본선진출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프랑스 TV는 94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일본이 이라크의 자파르에게 종료 직전 동점골을 내줘 첫 본선행이 물거품된 경기 비디오를 계속 방영하면서 자만하다 자멸한 대표팀의 자성을 촉구했고, 결국 ‘파리의 비극’을 98월드컵 우승신화를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반면 프랑스에 희생양이 된 팀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74, 78년 월드컵 연속 준우승으로 지구촌 팬들의 동정을 샀다. 더구나 82년 스페인월드컵 유럽예선 2조 마지막 경기에서는 프랑스를 꺾으면 조 2위로 본선티켓을 따내는데 0-2로 완패해 스페인행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네덜란드는 4년 뒤 유럽예선 5조에서 2위로 턱걸이해 플레이오프에 나갔으나 2조 2위인 벨기에와의 라이벌전에서 1승1패를 하고도 원정골 규정(원정경기 골은 홈경기 골의 두배로 계산)에 따라 또다시 본선문턱에서 분루를 뿌렸다.

66월드컵 우승국이자 90월드컵 4강에 올랐던 잉글랜드도 93년 11월 프랑스가 좌초하던 날 동반침몰했다. 산마리노의 티에리에게 월드컵 역사상 가장 빠른 골(9초)의 대기록을 헌납하기도 했지만 7-1로 대승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네덜란드가 폴란드에 승리하는 바람에 조 3위로 본선의 꿈이 좌절됐다.

프랑스도 잇단 비극 넘어 98월드컵 우승

사진/ 98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는 이전 두 대회의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AP 연합)
지난 9월5일 2002년 월드컵 본선진출이 확정된 스웨덴과 스페인도 격랑에 휘말려 본선 문턱에서 좌절을 맛본 적이 있다. 58월드컵을 개최해 결승까지 올라 브라질에 선전했던 스웨덴. 62년 대회 예선 1조에서 3승1패로 동률을 이룬 스위스와 독일에서 재경기를 가진 끝에 1-2로 분패했고, 그 후유증이 컸던 탓에 66월드컵 예선에서도 서독에 밀려 본선행이 좌절됐다.

50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던 스페인은 4년 뒤 예선 6조 홈경기에서 터키를 4-1로 이겼지만 원정경기에선 0-1로 패했다. 지금이야 골득실차로 본선티켓이야 당연히 스페인 몫이겠지만 당시엔 승점이 같으면 다시 경기해야 했기에 로마에서 격돌해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결국 또다른 규정에 따라 추첨으로 패한 스페인은 본선티켓을 터키에 넘겨주고 말았다. 터키는 54스위스월드컵 본선출전이 유일하며, 한국은 처녀출전한 이 대회에서 터키에 0-7로 대패하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제 네덜란드에 이은 대이변의 희생양이 될 강호가 또 나타날 것인가. 10월 유럽 남미예선 마지막 경기와 11월 플레이오프를 지켜보는 게 더욱 흥미로워졌다.

김한석/ 스포츠서울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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