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국경 없는 시민, 체제 없는 유럽인, 당파 없는 투사, 한계 없는 낙관주의자였습니다.”
지난 2월27일 수요일,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시민과 좌·우파 정치인을 대표해 24대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는 한 노인의 삶을 이렇게 추도했다.
17살 때 친구 엄마와 뜨거운 사랑
같은 시각 유엔인권이사회의 회의장. 회의 시작 전 세계 각국 대표들은 모두 기립해 고갤 숙였다. 의장은 “국제 인권운동의 거인을 잃었다”고 그를 추모했다. 유엔인권이사회 차원에서 한 개인을 위해 묵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장례에 앞서,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어 그의 삶과 사상을 기렸다. 그는 <분노하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테판 에셀이었다.
이처럼 유럽과 미국이 스테판 에셀에 대한 예우에 각별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가 지닌 무게를 짐작할 수 있지만, 사실 그는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바깥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전세계적 지성인으로 부상했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풀어줄 책 세 권이 동시에 출간됐다. 그의 마지막 자서전인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문학동네 펴냄)와 1997년에 쓰였다 이번에 번역된 <세기와 춤추다>(돌베개 펴냄), 지난해 12월부터 죽기 직전까지 스페인 유력 일간지에 연재됐던 대담집 <포기하지 마라>(문학세계사 펴냄)가 그것들.
먼저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에선 그의 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던 수많은 만남과 모험이 펼쳐진다.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며 자유와 행복을 좇아 영화 <줄 앤 짐>의 여주인공 모델이 된 어머니 헬렌 그룬트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메를로퐁티·에드가 모랭 등 사상가들과의 전율 어린 만남, 그리고 그의 나이 17살 때 34살이던 ‘친구 어머니’와 나눈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비롯해, 그의 생애 단 한 번 찾아온 동성애 경험 등 그 자신의 아주 특별한 사랑의 연대기가 담겨 있다. ‘분노하라’라는 강력한 슬로건과 레지스탕스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스테판 에셀의 인간적 매력, 그리고 <분노하라>가 불러일으킨 세계적 돌풍 이후, 그가 젊은 세대에게 당부하려는 메시지가 응축돼 있다.
한편 <세기와 춤추다>는 80대에 접어든 에셀이 (쿠바혁명 당시 체를 인터뷰하고 이후 68혁명의 주역으로 활동한) 후배 레지 드브레의 집요한 권유로 쓴 회고록이다. 독일의 유대인 작가 집안에서 태어난 에셀은 어릴 적부터 마르셀 뒤샹, 발터 베냐민, 피카소 등 당대의 거물들을 부모의 친구로 만났다. 15살에 철학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18살에는 런덩정경대학(LSE)의 좌파 정치학자 헤롤드 라스키 교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뒤 파리로 돌어와 20살에 파리 고등사범대학에 합격(그의 동기생은 루이 알튀세르)했다. 그 뒤 발발한 2차 세계대전에서 레지스탕스로 참전했다가 게슈타포에게 잡혀 수용소에 감금되었지만 극적으로 탈출한다. 이후 외교관의 길을 걷는 그는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는 등 자국의 이익을 넘어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혁명보단 민주주의 신뢰한 휴머니스트 죽음이 가까운 순간까지 <포기하지 마라>를 통해 “오늘날 오만한 돈의 힘과 시장 독재에 위협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저항을 촉구했지만, 그는 혁명보단 민주주의를 신뢰한 천생 휴머니스트였다. 평생 시와 사랑을 예찬한 로맨티시스트적인 기질에서, 불의에 저항한 그의 국제주의적 면모가 흘러나왔다고 세 권의 책은 말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레지스탕스에서 나치 포로, 그리고 외교관까지 스테판 에셀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그는 시와 사랑을 노래한 매력적인 ‘개인’이었다.
혁명보단 민주주의 신뢰한 휴머니스트 죽음이 가까운 순간까지 <포기하지 마라>를 통해 “오늘날 오만한 돈의 힘과 시장 독재에 위협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저항을 촉구했지만, 그는 혁명보단 민주주의를 신뢰한 천생 휴머니스트였다. 평생 시와 사랑을 예찬한 로맨티시스트적인 기질에서, 불의에 저항한 그의 국제주의적 면모가 흘러나왔다고 세 권의 책은 말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