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더 많이 주는 곳으로 이동하는 유명지휘자들… 프로스포츠와 생리 다를 바 없어
2001년 가을, 바야흐로 거물급 프리 에이전트(FA) 지휘자들의 트레이드 계절이 다가왔다. 오케스트라에서 상임 지휘자는 그 악단이 연주할 곡목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등 전반적인 악단의 예술적 측면을 책임지게 된다. 따라서 어떤 지휘자가 맡아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세계의 유명 악단들은 상임 지휘자로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로린 마젤, 뉴욕필로 가다
특히 이번 2001∼2002 시즌(전통적으로 서구의 교향악계는 학기와 마찬가지로 가을부터 그 다음해 초여름까지를 한 시즌으로 삼는다)의 상임 지휘자들의 이동과 트레이드 폭은 가히 전세계 악단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만한 수준이어서 더욱 흥미롭게 한다. 먼저 뉴욕필을 이끌던 쿠르트 마주르(74)가 런던필과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로 새 둥지를 틀게 됨에 따라 피츠버그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였던 로린 마젤이 내년 9월 가을 시즌부터 미국 지휘자로서는 실로 오래간만에 뉴욕필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노르웨이 오슬로필을 이끌고 있던 마리스 얀손스가 피츠버그필을 그리고 오슬로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전 남편 앙드레 프레빈이 새 둥지를 틀게 되었다.
대이동의 진원지인 뉴욕필의 경우, 동독 출신의 거장 쿠르트 마주르(뉴욕필 이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는 그동안 뉴욕필이라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예술적인 측면 외에도 행정적인 측면으로 시달림을 받아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활약했던 마주르로서는 뉴욕필의 여러 복잡한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필은 마주르가 재직하고 있었음에도 3년 전부터 공개적으로 “상임 지휘자 구합니다”라는 푯말을 세워놓았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마이클 틸슨 토머스, 라 스칼라 극장의 리카르도 무티, 마리스 얀손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같은 지휘자들이 물망에 오르내렸지만 결국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로린 마젤(71)이 200만달러가 넘는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95년 뉴욕필 역사에서 겨우 세 번째 미국인 지휘자일 정도로 전통의 유럽 지휘자를 좋아하는 뉴요커들이 그다지 마젤을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이외에도 65살을 맞는 일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27년간 이끌어오면서 젊음을 바쳤던 보스턴 심포니를 떠나 2002년 가을부터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옮기면서 오랫동안 미뤄왔던 오페라에 도전한다. 영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사이먼 래틀
이번 트레이드 시장의 대어는 뭐니뭐니해도 사이먼 래틀. 최근에 정경화와 EMI를 통해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내놓은 래틀은 세계 최고 교향악단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최근 10년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지난 1999년 6월, 5대 음악감독이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위암 수술 등 건강악화로 베를린필 단원들의 비밀 투표를 통해서 지휘자로서 최고의 명예라 할 베를린필 6대 음악감독으로 뽑혔으나 지난 수개월 동안 자신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약체결을 미루고 있었다. 그가 내건 조건은 재단법인화를 통한 시와 정치권의 간섭 배제, 단원들의 복리후생과 급여 인상 등이었다. 그의 요구는 다른 오케스트라들보다 2배의 연주를 해야 하지만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베를린필 단원들이 교수직이나 다른 오케스트라로 한해에 5∼6명씩 수석단원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에 대한 강력한 브레이크였다. 결국 래틀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켜 단원들의 지지도 한몸에 받고 동시에 지휘대에 오르기 전부터 단원들을 장악할 수 있는 힘도 거머쥐게 된 것이다. 경쟁 단체인 오스트리아 빈필이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고 객원 지휘자들로써 자신들만의 색채를 유지해나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베를린필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악단의 권좌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지방 오케스트라에 불과한 버밍엄 심포니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악단으로 키워놓은 사이먼 래틀이 세계 최고 교향악단을 2002년 9월부터 이끌게 된 이 사건은 영국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한껏 치켜세워주었다. 대중음악쪽에서는 비틀스, 롤링 스톤스 같은 최고의 스타들을 배출했고 지금도 뛰어난 아티스트들을 해마다 쏟아냈지만 클래식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뛰어난 작곡가,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가 모자랐던 영국에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이탈리아와 유대인 지휘자라는 양대 조류를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한 사건은 영국인들에게는 최근 독일에게 5-1로 이긴 영국축구만큼이나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최근 지휘자들의 대거 이동은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8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일이었지만 요즘엔 예전의 토스카니니가 NBC교향악단을,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필을, 스베틀라노프가 러시아 국립교향악단을 수십년간 지휘하면서 장기집권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오케스트라의 성격과 색채를 결정하던 시대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집권의 마지막 지휘자이던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는 자신의 이름을 명칭으로 삼던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하는 국립오케스트라’에서 최근 불성실과 해외공연을 이유로 쫓겨났다. 단원들이 독재를 견디지 못하는 데다가 이제 지휘자들도 완전히 밀착해서 한 오케스트라에 자신을 힘을 다 쏟아내어 오케스트라를 육성해내는 힘든 수고를 사양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요즘 지휘자들은 계약시 1년에 10주 정도를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면 쉽게 상임 지휘자가 될 수 있다. 나머지는 자신만의 시간이다. 그래서 요즘 지휘자들이 많게는 상임, 수석 객원 수석 지휘자, 부지휘자, 객원 지휘자 등의 이름을 달면서 많게는 5개 오케스트라를 함께 맡아 척척 지휘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경제논리. 즉 돈이다. 프로스포츠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물론 새로운 문화 경험을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지휘자들도 있지만 이렇게 지휘자들이 대거 이동하는 것도 모두 알고 보면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들이 조건 좋고 돈 더 많이 주는 곳으로 이동하듯, 유명 지휘자들도 대부분 매니저들을 통해서 몸값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고전음악시장의 활력소가 될 것인가
미국 음악시장에서 중시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름값. 빅스타일수록 청중이 표를 사고 콘서트홀을 많이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보다 더욱 많은 몸값을 받아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지휘자들뿐만이 아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최근 세계적인 석유회사인 페트로나스에 의해 탄생한 말레이시아필의 경우 말레이시아인 단원은 고작 10여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인부대로 이루어져 1년에 약 80여회의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데 단원 중에 거액을 받고 베를린필에서 자리를 옮긴 단원도 있을 정도이다.
상임 지휘자들의 잦은 대이동으로 이제 세계의 오케스트라들은 모두 똑같아서 자신들만의 취향이나 색깔이 부족하다는 비판의 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지휘자들이 바뀔 때마다 필자는 지휘자와 단원들의 재혼을 통해서 궁합이 정말 잘 맞았을 때 그들이 들려줄 아름다운 화음과 새로이 해석될 고전음악을 가슴 설레면서 기다리게 된다. 이번 가을부터 시작될 지휘자들의 지각변동, 침체된 고전음악 시장의 활력소가 될 것인지 희망을 걸면서 기다려보자.
장일범/ 음악평론가

사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트레이드 전쟁은 유명 스포츠선수들의 트레이드 경쟁을 방불케 한다.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 리카르도 무티.(EMI 제공)
대이동의 진원지인 뉴욕필의 경우, 동독 출신의 거장 쿠르트 마주르(뉴욕필 이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는 그동안 뉴욕필이라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예술적인 측면 외에도 행정적인 측면으로 시달림을 받아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활약했던 마주르로서는 뉴욕필의 여러 복잡한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필은 마주르가 재직하고 있었음에도 3년 전부터 공개적으로 “상임 지휘자 구합니다”라는 푯말을 세워놓았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마이클 틸슨 토머스, 라 스칼라 극장의 리카르도 무티, 마리스 얀손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같은 지휘자들이 물망에 오르내렸지만 결국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로린 마젤(71)이 200만달러가 넘는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95년 뉴욕필 역사에서 겨우 세 번째 미국인 지휘자일 정도로 전통의 유럽 지휘자를 좋아하는 뉴요커들이 그다지 마젤을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이외에도 65살을 맞는 일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27년간 이끌어오면서 젊음을 바쳤던 보스턴 심포니를 떠나 2002년 가을부터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옮기면서 오랫동안 미뤄왔던 오페라에 도전한다. 영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사이먼 래틀

사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을 이끌게 된 사이먼 래틀.(EMI 제공)

사진/ 200만달러가 넘는 고액연봉을 받고 뉴욕필로 옮긴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지휘자 로린 마젤.(BMG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