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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생체시계를 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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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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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생물학 이용한 기기로 생체리듬 재편성… 인체 영향 불확실해 주기에 따른 처방이 효과적

사진/ 삼내비 안경을 착용한 모습.
군인들이 수면주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전투상황에 맞게 잠자는 시간을 조절해 전투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군인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모는 피로쯤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 보초 근무병이 잠시 조는 틈에 벌어지는 적의 침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최정예 첨단군인들의 필수품으로, ‘일광안경’을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첨단기기가 내장된 안경을 이용해 군대가 깨어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미 미국 인라이턴드 테크놀로지 어소시에이트사(ETA)는 ‘삼내비’(Somnavue)를 개발해 24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을 마음대로 조절할 길을 열어놓았다. 생체시계의 원리에 의한 ‘시간생물학’(chronobiology)이 첨단과학제품을 통해 구현되는 셈이다.

항상 깨어 있는 군대 만드는 첨단기기

사진/ 미국 인라이턴드 테크놀로지 어소시에이트가 개발한 일광안경 삼내비. 삼내비는 특정 색깔의 빛을 이용해 생체주기를 조절한다.
삼내비는 빛을 이용해 인간의 생물학적 리듬을 인위적으로 바꾼다. 겉으로 보면 안경과 유사한 휴대형 기기로 소형 전원장치가 딸려 있다. 전원장치에서 생성된 빛은 광전자 케이블을 타고 안경렌즈의 유리섬유다발로 이동한다. 다시 유리섬유를 통해 눈의 특정부위에 전달된 빛이 눈의 움직임을 피로와 잠의 패턴을 통제하는 두뇌의 시상하부에 연결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눈에 전달되는 빛을 조절해 생체리듬을 재편성한다. 삼내비는 사용자의 주문에 따라 24시간 리듬을 변화시킨다. 예컨대 전쟁터의 병사가 저녁 무렵 휴식시간을 이용해 일정시간 동안 삼내비를 착용하면 그때부터 생체리듬이 새롭게 시작된다. 24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을 과학의 힘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이렇듯 첨단기기로 제어가 가능하게 된 생체리듬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박테리아에서부터 식물·동물·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들은 매우 정교한 생체 내부의 시계에 의해 생명현상을 유지한다. 생물의 체온, 혈압, 호르몬 분비, 소화, 소변, 수면 등 다양한 활동이 생체리듬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다. 만일 생체리듬의 주기가 깨지면 피로가 누적되고 면역력이 떨어져 심각한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대륙을 오가는 비행기 여행자들이 겪는 시차고통이다. 이처럼 행동이나 생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생물학적인 시계는 분자적인 수준에서 매우 복잡하다. 아무리 정교한 스위스 시계일지라도 생체시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따라갈 수는 없다.

생체시계는 빛을 통해 생명현상에 영향을 끼친다. 빛은 망막에 있는 세포를 통해 뇌에 전달되고, 뇌에 전달된 신호를 바탕으로 각종 호르몬 분비기관에 명령을 내린다. 망막의 대표적인 세포의 하나는 간상세포(rod cells)로 밤의 시각을 조절하며, 다른 하나는 원추세포(cone cells)로 색깔을 구별하게 한다. 포유류와 같은 고등생물의 중추 생체시계는 뇌 시상하부에 있는 ‘교차상핵’(SCN: suprachiasmatic nucleus)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CN은 망막에서 일주기 정보를 얻어내고, 뇌 중앙에 있는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수면조절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이용해 24시간 주기에 따른 생체시계를 조절한다. 만일 송과선에서 적정량의 멜라토닌이 분비되지 않으면 잠이 들지 않게 된다. 멜라토닌 수치는 특정한 색깔의 빛에 의해 조절된다. 빛의 색깔에 따라서 24시간 주기가 재편성되는 셈이다.

최근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시계 유전자의 실체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분자생물학의 발달에 힘입어 시계 유전자를 클로닝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시계의 내부적 작동은 초파리에서 처음 밝혀졌다. 피리어드(Period)나 타임리스(Timeless) 같은 이름을 가진 초파리의 시계유전자들은 누에고치로부터 성충 파리가 나타나는 시기를 조절하거나 다른 시간대에서 각기 다른 활성을 나타내게 한다. 지난 1998년 노스웨스턴대학 조셉 타카하시 박사팀은 생쥐의 시계유전자를 클로닝해 생체시계 조절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포유류의 시계유전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인간의 시계유전자가 밝혀진다면 삼내비와 같은 수면 조절용 첨단기기도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게다가 생체시계의 메커니즘을 통해 노화를 늦추는 것도 가능하며 불치병 치료에도 이용될 전망이다. 암세포 같은 비정상적인 세포는 생체시계가 오작동하면서 생긴다는 보고도 있다.

최근 24시간 주기의 생체시계 원리는 각종 질환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있다. ‘시간요법’(chronotherapy)은 개인의 생체리듬을 이용해 부작용을 줄이면서 치료에 도움을 준다. 미국 텍사스대학의 시간생물학자 마이클 스몰렌스키 박사는 “대부분의 의사들은 약 복용시간이 약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특정 질환은 24시간 주기패턴을 보이기에 복용시간을 잘 맞추면 약효가 높아진다. 예컨대 천식은 주로 밤시간에 발생하며 일반적으로 낮보다 증상이 더 심하다. 천식환자들은 초저녁에 약을 복용하면 심야에 천식을 줄일 수 있다. 위산은 야간에 더 많이 분비되기에 궤양환자들은 저녁을 먹으면서 특정 산(酸) 저해제를 복용하는 게 좋다. 항생제는 오전 11시쯤에 먹는 게 효과적이다. 그 무렵에 감염균에 대한 체내 방어력이 가장 취약해 항생제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퇴행성 골관절염은 초저녁이나 밤에 가장 통증이 심하므로 이에 맞춰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면 약효가 높다.

시간요법에 따른 처방으로 약효 높여

자료 : 사이언스 올제/ 일러스트레이션 : 차승미
아예 생체주기에 따른 시간요법형 약물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특정 시간에 특정 질병을 악화시키는 생체리듬의 원리를 이용해 약물의 효용성을 높이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슈왈츠제약의 고혈압 치료제 ‘베를랜(Verelan) PM’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서 막 깨는 이른 아침에 혈압이 갑자기 오른다. 당연히 고혈압 환자들에게 아침시간은 특히 위험하다. 심장마비와 뇌졸중 등이 이른 아침에 많이 발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까닭에 혈압약은 이른 아침에 효능이 작용해야 효과적이다. 취침 전에 복용하는 베를랜 PM은 표면을 특수코팅 처리해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다가 다음날 아침 6시 무렵에 약효가 최대치에 이른다. 뉴로젠사가 내놓은 불면증 치료제는 복용 즉시 수면상태로 유도하고 아침에는 투약효과가 완전히 사라진다.

생체시계에 관련된 유전자들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시계유전자들의 활성이 빛에 달려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낮과 밤이 바뀌는 가운데 빛이 순환적으로 변하면서 몸의 생리적인 리듬을 조절하는 것이다. 만일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신약이 개발된다면 24시간 주기의 리듬을 자유롭게 바꾸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공적인 방식의 생체리듬 제어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불분명하다. 삼내비가 잠을 조절해 48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을 만든다 해도 생체시계가 거기에 맞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밤시간에 눈을 뜨고 있어도 인체의 기능이 잠들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으로선 24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을 인위적으로 바꾸기보다는 시간요법 등을 이용해 생체시계의 작동 메커니즘을 존중하는 게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참고자료

<24시간 사회>(레온 크라이츠먼 지음·민음사 펴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2000 4월호), ETA사 홈페이지(www.etai.com)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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