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에게 가위질 당하는 설계디자인…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쳐지거나 도둑질당하기도
하나의 건물이 계획돼 완공될 때까지 건축가가 거쳐야 하는 어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건축주의 기호나 빠듯한 예산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건축법과 공간적 제약에 디자인까지, 그리고 재료 선택문제 등등 도처에 널려 있는 고민들이 괴롭힌다. 하지만 건축가들에게 이러한 장애물은 그렇게 심각한 고민거리이거나 화낼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늘 해온 일이고 이런 고민들이야말로 건축가들이 말하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건축을 하기 위해 당연히 거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을 분노하게 하는가
그렇지만 건축가들이 정말 심하게 분노할 때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건축가가 갖은 고통 끝에 만들어낸 창의적 디자인이 다른 사람의 머리와 손을 거치면서 원래 의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바뀌어버리는 경우이다. 바로 이때 건축가들은 분노한다. 이런 사례는 실제 빈번하게 일어나며 공공건물을 짓는 관급공사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한 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건축가는 상처받는다.
이처럼 건축가의 설계의도가 왜곡된 최근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올해 7월에 일반인들에게 선보인 은평구립도서관(설계 곽재환)을 꼽을 수 있다. 서울 불광동 주택가 근린공원에 자리잡은 이 도서관은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다. 경사진 지형에 맞춰 계단식으로 구성된 건물과 뒤편의 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공간구성방식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건축전문지에 많이 소개되면서 건축계에서 많은 관심을 모은 건물이다. 하지만 옥에 티랄까. 건물 준공을 며칠 앞두고 현장을 방문한 건축가 곽씨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국기게양대의 위치 때문이었다. 설계대로라면 옥외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졌어야 할 국기게양대가 건물 한가운데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곽씨가 게양대를 건물 중앙이 아닌 주변부에 배치했던 이유는, 건물 중앙부를 비워둠으로써 자연과 건물의 교감, 그리고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놀란 곽씨는 은평구청에 게양대를 원래 위치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구청쪽은 “주변에 변압기가 설치된 고압전주가 설치되는 점, 그리고 국기에 대한 존엄성을 감안해 부득이 옮길 수밖에 없었다”며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제17조(국기게양 위치) 규정을 근거로 발주청, 감리단, 시공자의 의견을 모아 게양대 위치를 선정했으므로 공사 진행 도중에 다시 옮기는 것은 어렵다”고 응답했다. 곽씨는 “원래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기를 바라며 노심초사했던 당초의 의도가 크게 왜곡돼버렸다”며 “국기게양대가 이 장소의 주인으로 자리바꿈해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제압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고 애석한 심정을 토로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문화시민의 자유정신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구성한 중앙공간에 국기게양대가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우뚝 들어서는 바람에 원래 설계의도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국 건축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와 건축가를 대하는 건축주의 자세다. 설계를 고치는 과정에서 설계자에게 한마디 상의도 구하지 않은 것은 건축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곽씨는 이 밖에도 원래 설계를 따르지 않고 시공자가 마음대로 출입구 부근의 중앙정원에 설치한 스테인리스 스틸 난간도 철거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것 역시 구청에 거부당했다. 곽씨는 “원래 설계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난간이 과다하게 설치되면서 중앙정원을 둘러싼 창 너머로 보이는 공간의 미학이 크게 훼손됐다”고 아쉬워했다. 공중화장실 설계, 법정까지 가다
결국 곽씨가 요구한 문제들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공사는 일단락되고 말았다. 하지만 건물 자체가 시립도 아닌 구립 건물인데다 건축미학상 뛰어난 건물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도서관 중심부에 국기게양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음으로 인해 건물이 주는 서사적 힘이 상당히 축소되고 흡사 연병장 사열대 같은 권위적인 공간으로 돼버다. 은평구청의 주장은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위치변경에 대해 건축가와 상의하고 옮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국기게양대는 반드시 건물 정가운데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까. 이 때문에 결국 공연이라도 벌일 경우 무대가 될 수도 있는 가운데 마당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행정당국의 권위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저작권분쟁을 일으켰던 신촌역 앞 서울시 시범공중화장실 또한 건축가의 독창적인 설계안이 자치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가위질 당해 초라하게 변해버린 사례로 꼽힌다.
문제의 화장실 건축물은 지난 99년 서울시가 ‘2001 한국방문의 해’와 ‘2002 월드컵대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앞두고 화장실 시설 개선을 위해 계획한 것이었다. 도시미관을 고려해 현대적이고 편리한 공중화장실을 지어 시민들에게 선보이겠다는 것이 취지였다. 이 작업을 맡은 토마건축(대표 민규암)은 서울시와 협의해 서대문구에 설계도를 건넸다. 그러나 서대문구가 공사를 시행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서대문구가 설계자의 동의없이 제3자에게 의뢰해 설계안을 대폭 고쳐 건물을 지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설계자 민씨는 서대문구의 일방적인 설계변경으로 기형적인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저작권 침해와 공사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결국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서 조정에 들어가 서대문구에 원래의 설계안대로 재시공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서대문구는 끝내 건축가와 협의없이 공사를 강행했다. 그뒤 이 문제는 결국 법정으로 넘어갔는데 법원 판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대문구청쪽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 건축가는 항소를 고려하고 있어 불씨는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다.
이처럼 건축가의 설계안이 건축주의 입맛대로 침해당하는 경우는 사실 부지기수다. 최근 사례로 제주도 서귀포시 소재 테디베어박물관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건축주 혹은 건축가에 의해 애초 건축가의 설계안이 도용되고 무시돼버린 사례다.
‘김옥길 기념관’에서 배운다
좋은 건축물이란, 너무나 당연하지만 건축주와 건축가의 좋은 관계에서 나온다. 건축주가 건축가의 창의적인 설계를 존중하고 최대한 아이디어를 이끌어 좋은 결실을 맺은 사례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옥길기념관이다. 건축주인 김동길 박사는 “설계가 어떻게 되건 공사가 어떻게 되건 일체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100년, 200년 뒤에 이 집 앞을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발을 멈추고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집을 지어달라”고 건축가인 김인철씨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건축가 김씨는 콘크리트와 유리만으로 구성된 이색적인 건물을 과감하게 계획했다. 그 결과 김옥길기념관은 현재 훌륭한 미니멀리즘 건축으로 평가받으며 명물 건축물로 사랑받고 있다.
건축은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말한다. 그 한가운데에 건축가가 있다. 건축가의 창작의지를 최대한 이끌어낼 것인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권위로 밀어붙이는 가위질을 할 것인가는 결국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는다.
김용삼/ 월간 기자·건축기자협회 회장 www.aja.or.kr

사진/ 은평구립도서관. 원래 설계와는 달리 국기게양대가 중앙에 배치되면서 건축가가 의도한 건물과 공간의 의미가 왜곡되고 말았다.(윤진)
이처럼 건축가의 설계의도가 왜곡된 최근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올해 7월에 일반인들에게 선보인 은평구립도서관(설계 곽재환)을 꼽을 수 있다. 서울 불광동 주택가 근린공원에 자리잡은 이 도서관은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다. 경사진 지형에 맞춰 계단식으로 구성된 건물과 뒤편의 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공간구성방식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건축전문지에 많이 소개되면서 건축계에서 많은 관심을 모은 건물이다. 하지만 옥에 티랄까. 건물 준공을 며칠 앞두고 현장을 방문한 건축가 곽씨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국기게양대의 위치 때문이었다. 설계대로라면 옥외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졌어야 할 국기게양대가 건물 한가운데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곽씨가 게양대를 건물 중앙이 아닌 주변부에 배치했던 이유는, 건물 중앙부를 비워둠으로써 자연과 건물의 교감, 그리고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놀란 곽씨는 은평구청에 게양대를 원래 위치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구청쪽은 “주변에 변압기가 설치된 고압전주가 설치되는 점, 그리고 국기에 대한 존엄성을 감안해 부득이 옮길 수밖에 없었다”며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제17조(국기게양 위치) 규정을 근거로 발주청, 감리단, 시공자의 의견을 모아 게양대 위치를 선정했으므로 공사 진행 도중에 다시 옮기는 것은 어렵다”고 응답했다. 곽씨는 “원래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기를 바라며 노심초사했던 당초의 의도가 크게 왜곡돼버렸다”며 “국기게양대가 이 장소의 주인으로 자리바꿈해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제압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고 애석한 심정을 토로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문화시민의 자유정신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구성한 중앙공간에 국기게양대가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우뚝 들어서는 바람에 원래 설계의도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국 건축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와 건축가를 대하는 건축주의 자세다. 설계를 고치는 과정에서 설계자에게 한마디 상의도 구하지 않은 것은 건축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곽씨는 이 밖에도 원래 설계를 따르지 않고 시공자가 마음대로 출입구 부근의 중앙정원에 설치한 스테인리스 스틸 난간도 철거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것 역시 구청에 거부당했다. 곽씨는 “원래 설계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난간이 과다하게 설치되면서 중앙정원을 둘러싼 창 너머로 보이는 공간의 미학이 크게 훼손됐다”고 아쉬워했다. 공중화장실 설계, 법정까지 가다

사진/ 신촌역 앞 서울시 시범 공중화장실 모형. 원래 설계(위)와는 달리 축소(아래)되는 바람에 건축가가 법적 조치를 위하는 등 논란을 빚고 있다.(최충욱)

사진/ 건축주가 건축가의 창의력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기념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 건축물로 탄생한 김옥길 기념관(박영채, 아르키움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