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하면서 강렬한 두 마디
고종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책, <해피 패밀리>
등록 : 2013-03-22 07:04 수정 : 2013-03-25 15:36
지난해 7월 자전거포를 차리면서, 550만 자영업자의 일원이 되었다. 전에는 책 파는 서점에서 1년 6개월, 책 만드는 출판사들에서 10년쯤 일했다. 자영업자가 되고 나니, 통 책을 읽지 못한다. 책에 물렸나? 그런 건 아니다. 시간이 없나? 절대 시간이 줄긴 했어도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책 속 문자의 메시지나 숨은 뜻이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차라리 자전거와 관련한 기계적 메커니즘에 대한 글이나 부품의 매뉴얼 같은 건조하고 명료한 글자의 조합이 반갑다. 하여 이 부담스러운 원고 청탁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마감의 위력 앞에 몇 권의 책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휘휘 사라지는 생각의 흔적들을 그나마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끝까지 손에 붙들고 읽은 책이 다섯 권쯤 될 듯싶다. 그 가운데 가장 반갑게 읽은 한 권이 고종석의 마지막 책‘이라는’ <해피 패밀리>다. 오랫동안 고종석의 견실한 독자였다. 학생 때 <한겨레> 문학 면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눈에 새겼고, 첫 책 <기자들>부터 이번 <해피 패밀리>까지 그의 모든 책을 사서 읽었다. 그는 지난 20년간 내 정신세계(인간에 대한 이해, 정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필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전작 <독고준>에 실망한 터라(이미 지면을 통해 발표했던 서평 등을 다시 책에 재활용한 것을 보고, 그의 치열함이 그의 게으름에 굴복했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번 소설 <해피 패밀리>에도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가족을 이루는 10명의 구성원이 각자의 시선으로 어딘가 위태스러운 안녕을 지탱하고 있는 가족사의 비밀을 풀어내는 그저 그런 부조리극 정도라 생각했던 것.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개성의 소설 캐릭터들이 두 마디 텍스트를 통해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되었다. 설마 했던 것이 마지막 문장을 통해 확인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윤리적 판단,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렸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나 영화 <그을린 사랑>의 부조리함이 무지에서 비롯된 운명적인 것이었다면, 이 담대하고 강인한 가족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스스로 선택한 삶의 결과를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무심하면서도 강렬한 두 마디가, 고종석이 육필로 써낸 마지막 텍스트가 될 것인가?
뱀꼬리: 편집을 담당한 책 가운데 박노자 교수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라는 책이 있다. 제목을 고심하다가, 고종석의 <한국일보> 칼럼 제목 ‘왼쪽으로 좀더 왼쪽으로’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약간 달리해서 박 교수의 책 제목으로 써도 괜찮겠느냐 양해를 구했으나 책 속에 제목의 사연을 밝히지 못했다. 우연히 함께한 자리에서 그는 넌지시 그 일에 항의했고, 나는 다음 쇄에는 꼭 그 내용을 집어넣겠다고 약속했다. 새로 다음 쇄를 찍을 기약이 없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이런 기회에라도 밝힐 수밖에…. “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박상준 흑석동자전거포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