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소망은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집 앞 개울이 넘쳐 다리가 두 동강 나는 것이었다. 시험 전날 간절히 기도까지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상 못한 정전으로 불가피하게 저녁 식사를 라면으로 때웠던 사건을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나는 매일 똑같은 나날이 반복되는 중에 무언가 예기치 못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기 바라는 철딱서니 없는 소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태어나서 자란 시기는 격동의 현대사였다. 변화의 무풍지대 같았던 삶 너머에는 박정희 독재가 꽃피운 10월 유신이 있었고, 광주에서 불어온 5월도 있었다. 물론 나는 무관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1988 서울올림픽에는 감동했지만 1987년 6월 항쟁은 최루탄 냄새 때문에 짜증만 냈다.
이 정도는 돼야, 패션의 완성!
그런데 꿈꾸던 비범한 삶이 나에게 찾아왔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며 한국 영화로 상영 중인 <남쪽으로 튀어>에 나올 법한 사건들이 매일 벌어진다. 주인공 최해갑·안봉희 같은 인물들이 언제나 출연 중이다. 남들이 쉽게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 라고 물어볼 만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다. 수영장까지 쫓아오는 이상한 사람의 덜미를 잡고 물었더니, 국정원 직원이더라는… 간첩 누명 쓸지 모를 비범한 인물. 장애가 남을 정도로 경찰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지만 되레 감옥에 갇혀 방금 출소한 억울한 인물. 노동조합 만들었다고 버스 운전사에서 해고돼 천막 치고 농성하는 투사가 된 인물. 출연진에는 15만4천V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서 100일 넘게 둥지를 튼, 특별한 인물들도 있다. 이 정도는 돼야, 패션의 완성. 아니아니 그야말로 특이한 인생의 완성! 비범한 삶에 대한 꿈을 이루었지만 행복하지 않다. 기구해도 지나치게 기구한 출연자들 덕분이다. 비슷하게 비범한 인생을 사는 어떤 사람의 경우, 전직 대통령을 명예훼손하고 전격적으로 구속된 지 딱 8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됐다. 이 정도면 위기도 있고 극적 해결도 있으니 출연해볼 만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쭉 위기만 있다. 반전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나는 무능력해서 자주 무릎이 꺾인다. 된장이 보글보글 끓는 저녁 시간을 돌려주고 싶으나 쉽지 않다. 평범한 삶이 싫었던 어떤 소녀는 누군가들의 평범한 삶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지부동인 세상은 쓴맛이다. 맙소사 지구가 망하길 바라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누군가의 고통이 범람하는 오늘도 어떤 이는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울 것이다. 상사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며 보고서를 쓰고 때로는 시말서를 쓸 것이다. 연구를 하고 노래를 하고 사랑도 할 것이다.
세상은 지금처럼 늘 한결같이 불공평할 것이 뻔하다. 물론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무사태평했던 시절, 목숨 걸고 전남도청을 지킨 시민들이 있었듯이.
낯선 이를 환대하는 식탁
그래서 우리 모두는 기억하면 된다. 잔치는 끝났다며 후일담 소설을 쓰던 그때도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시대를 절망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평범하기 때문에 비범하게 되어, 통탄의 시대를 맨몸으로 먼저 부대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그들이 바스티유 감옥 문을 열고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들이라는 것도. 익숙하면서도 나쁜, 낡은 것이 몰려오는 시대. 우리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식탁을 열자. 평범하지만 비범한 모든 이웃을 초대해서 밥을 먹고 즐기자.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대중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