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친일파처럼 떠드는 수구세력… 남과 북은 서로를 더 많이 고무·찬양해야 한다
만경대 방명록 파문의 주역이 강정구 교수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만약 내가 만경대에 갔더라면, 그리고 북의 안내원들이 방명록에 서명을 요구했다면 무엇이라 글을 썼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연한 생각은 아니었다. 오래 전에 식구들끼리 같이 가기로 계획한 여행이 아니었다면, 아니 만약 방북단 일정이 조금 일찍 확정되었다면 필자도 틀림없이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양에 갔다면 평소 많은 가르침을 받아온 강 교수와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았을 것이고, 특히 만경대 같은 곳에서는 학문적 관심이 거의 같은 강 교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방명대 앞에 가지 않았을까.
만경대의 사립문
강 교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떠올리고 만경대정신을 방명록에 썼지만, 나는 아마도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는 만경대의 사립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 하나뿐이였다”면서, “나는 그때부터 남의 집 사립문에 들어설 적마다 이 사립문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몇이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사립문들에는 눈물에 젖은 이별의 사연이 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혈육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병사한 아버지 어머니, 유해도 찾지 못한 전사한 동생 철주, 그리고 옥사한 작은삼촌 김형권, 13년8개월의 오랜 감옥 생활 끝에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난 외삼촌 강진석 등을 그리면서 김일성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독립을 찾기 위해 나선 모든 가정의 사립문에 서린 아픔을 그렸던 것이다.
필자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방명록에 남겼다면 이 ‘광란’의 나날에 필자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없이 김일성 일가의 ‘날조된’ 항일투쟁을 찬양한 몸이 되었을 터이니까. 다행히(!) 필자는 평양에 가지 않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강 교수는 국가보안법 7조의 고무찬양죄 위반으로 옥에 갇힌 몸이 되었고, 강 교수와 함께 평양에 갔던 임종인, 김동균 두분 변호사가 강 교수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임종인 변호사는 강 교수와 함께 나란히 보세구역을 나와 한명은 피고인석으로 가고, 한명은 변호사석에 앉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강 교수는 우리 사회의 몇 안 되는 이북 전문가의 한 사람이고, 필자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북한사회의 이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강 교수는 평양이 이번이 초행길이고 필자는 아직 평양에 가보지 못했다. 어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이북 전문가들 대다수가 아직 평양에 발을 디뎌보지 못한 채 코끼리의 일부분이라도 직접 만져본 장님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형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북 전문가가 왜 평양에서 그런 글을 남겼냐고 강 교수를 비난하지만, 필자는 20년이 넘게 학문의 대상으로만 삼았던 가깝고도 먼 땅에 첫발을 디딘 이북 전문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북 전문가가 평양에 발을 디딜 때 더 들뜰 수밖에 없는 현실, 이것이 바로 분단 57년의 비극이다. 만약 방남단에서 돌출행동을 한다면
보수언론에서는 강 교수나 방북단을 주사파라고 비난하면서 이들의 행동이 돌출행동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앞으로 이보다 훨씬 더 심한 돌출행동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더 속좁은 우리 사회는 통일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남쪽의 ‘관제 주사파’에 대해 수구세력은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가 함께 통일을 이루려 하는 이북에는 철두철미한 주사파가 2천만명이나 있다. 현재 중단되어 있지만 남북간에 이산가족 방문단의 교환방문과 민간교류가 활성화된다면 이번의 ‘돌출행동’보다 더한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번 방북단의 체류기간에는 보수언론이 상세히 보도한 ‘친북적 돌출행동’ 이외에도 반북적 돌출행동 또한 무척 많았다고 한다. 주민들이 굶어죽는데, 호화건축물은 다 무엇이냐며 북을 비난하고, 묘향산의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한 진귀한 물건들은 외국의 사절들이 선물한 것이 아니라 이북 정부가 돈 주고 사온 것이 아니냐며 이북 안내원들의 속을 후벼파는 행동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금강산에서 이북 사람들에게 불쾌한 질문을 거듭한 어느 아주머니 한분을 억류하여 남쪽 정부와 국민들을 답답하게 했던 이북이 이번에는 이런 ‘돌출행동’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돌출행동은 방북단에 의해서뿐 아니라 방남단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이북에서 온 방문단이 광주에 가서 “5·18정신 이어받아 민주화를 이룩하자!”라고 방명록에 쓴다든지, 공업단지를 둘러보고 “새마을정신 이어받아 경제건설 이룩하자!”라고 쓴 ‘돌출행동’ 때문에 이북에 돌아가자마자 강경보수파의 성화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통일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돌출행동을 ‘국론통일’의 명목으로 반혁명죄로 다스리는 이북 당국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인가?
통일은 남과 북의 분단과 대립을 역사 속으로 보내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여는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와 같이 서로를 비난하고 흠집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서로가 거둔 성과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그 성과를 거두는 과정에서의 힘든 일들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두 형제가 있었다. 한쪽은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 다른 한쪽은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 두 형제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이제 다음 세대에서 화해를 하려 한다면 서로를 비난하는 일부터 거두어야 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보고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자식들 다 굶겨가면서 체면만 따지고 있다”고 하거나, 반대로 “돈이 최고냐, 간도 쓸개도 없이 미국놈, 일본놈 밑구녁이나 빨고 있다”라고 비난한다면 둘은 절대로 화해할 수 없다. 진정 화해를 이루려 한다면 많은 것을 서로 접어주면서 서로가 겪어온 간단치 않고 험난했던 역사를 통해 이룬 성과를 인정해주고 민족 공동의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말은 노무현, 행동은 이회창?
지금 우리 사회에서 70살 이상의 인구는 전체의 4%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70살이라고 해봐야 해방 당시에 열네살이니, 분단과 전쟁의 당사자라 할 만한 나이는 아니다. 남쪽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시대가 아닌 것처럼 이북 역시 김일성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미 분단은 2세 또는 3세들의 대결로 넘어간 지 오래이다. 분단이 2세 또는 3세들의 대결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세나 3세들은 부모 세대의 선택이나 운명에 의해 남이나 북의 어느 한쪽에 살게 되었거나, 태어나보니 남쪽이나 북쪽인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평양의 3호청사에서 대남사업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북의 엘리트 관료들은 남에서 태어났다면 반체제운동을 하기보다는 고시에 합격해서 공안검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큰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남쪽 엘리트 관료들이 북에서 태어났다면 유능한 당 일꾼이 되었을 것이고, 극우의 논객들은 그들이 ‘동토의 왕국’이라 부르는 북에서 반공투사가 되기보다는 <로동신문>이나 <근로자>의 글쟁이가 되어 체제옹호의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당사자 세대의 대결을 넘긴 오늘의 분단에서 이런 운명의 우연성의 여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화해의 길을 열 수 없다.
방북단의 평양에서의 행동을 놓고 보수언론들은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을 방불케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에는 분명히 좌익이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세계사적인 기준에서 볼 때 좌파라 할 만한 세력이 형성돼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일삼는 극우파의 기준에서 볼 때 좌파가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이후 이 땅에는 거의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유지돼왔다.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 좌파세력을 상대로 수구세력은 우리 사회가 악령이 떠돌고 홍위병이 설치고 사회주의자들이 날뛰는 혼란에 빠져 있다며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을 방불케 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난센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가 좌우대립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에 그런 역할을 한 자들은 친일파였다.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가 지속된다면 친일파들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전에도 이 난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조선인들을 보기로 하자. 이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 아래서는 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살해한 민족반역자로 처단의 대상이었지만, 좌우대립의 구도 속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데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좌우대립’ 구도는 언론사 탈세비리 파문으로 궁지에 몰린 보수언론이 국면전환을 노리며 부추긴 것이다. 강 교수의 갑작스러운 구속으로 수업을 받을 수 없게 된 동국대의 제자들은 현 정부도 “말은 노무현처럼 하면서 행동은 이회창처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왜 기를 쓰고 연방제를 기피하는가
보수언론과 정부는 3대헌장 기념탑 근처에 가는 것이 북의 연방제통일방안을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방제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좀더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연방제는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8월에 이북이 처음 제안한 것으로,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으로 완성되었다. 연방제란 남북이 서로간에 이미 확립된 체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통일을 모색하자는 방안이다. 실상 무력에 의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벌하는 전쟁에 의한 방식을 제외한다면, 그리고 동구에서 본 바와 같이 체제가 자살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선택은 영구분단의 길로 가거나 아니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언론은 연방제를 기를 쓰고 기피한다. 바로 이북의 통일방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의 통일방안은 이북처럼 일관성 없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어 애꿎은 수험생들만 고생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연방제라는 거의 유일한 통일방안을 북에 선점당한 상태에서 연방제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무언가 다른 방안을 찾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북이 아직도 연방제를 버리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통일조국 내에서의 ‘평화적인 체제경쟁’을 피할 수 없는 연방제는 국력이 강한 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북이 처음 연방제를 제안했을 때는 남쪽에 비해 총체적인 국력이 훨씬 앞선 상태였고,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제 방안을 제안할 때만 해도 남쪽이 이북을 추월했다고는 하지만, 그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으며 아직 이북이 자신들의 체제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남쪽의 언론에 의하면 남쪽의 국력이 북쪽 국력의 27∼28배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압도적인 국력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연방제를 기피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북쪽이어야지, 우리가 연방제를 기피할 이유는 없다. 이미 지난해의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쪽의 연합 제안과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하였다. 만약 6·15공동선언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연방제에 대해 진지한 검토를 해보아야 한다.
강정구 교수 등은 마지막 구속자 돼야
강정구 교수와 범민련 관계자들은 석방되어야 한다. 강 교수가 쓴 글귀가 남쪽의 일반 정서와 맞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범죄행위가 될 수는 없다. 강정구 교수보다 훨씬 더 심한 말로 북을 찬양한 정주영씨나 역대 정권의 대북 밀사들도 있지 않았는가? 더구나 구속이 성립되려면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야 하는데, 강 교수가 만경대에 있는 방명록을 찢어 없앨 수도 없지 않은가?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북은 남을 고무·찬양해야 하고 남은 북을 고무·찬양해야 한다. 북은 남이 거둔 물질적 성과를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로 찬양해야 한다. 남은 또 북이 큰 나라들에 대해 큰소리쳐온 역사를 연개소문 죽고 처음이라고 부추겨주어야 한다. 남과 북 각각이 이런 성과를 거두기 위해 치른 아픔에 대한 평가는 당분간 남과 북 각각의 주민들에게 넘기고, 남과 북은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정구 교수와 범민련 관계자들은 마지막 구속자가 되어야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한홍구 교수.(강창광 기자)
필자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방명록에 남겼다면 이 ‘광란’의 나날에 필자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없이 김일성 일가의 ‘날조된’ 항일투쟁을 찬양한 몸이 되었을 터이니까. 다행히(!) 필자는 평양에 가지 않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강 교수는 국가보안법 7조의 고무찬양죄 위반으로 옥에 갇힌 몸이 되었고, 강 교수와 함께 평양에 갔던 임종인, 김동균 두분 변호사가 강 교수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임종인 변호사는 강 교수와 함께 나란히 보세구역을 나와 한명은 피고인석으로 가고, 한명은 변호사석에 앉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강 교수는 우리 사회의 몇 안 되는 이북 전문가의 한 사람이고, 필자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북한사회의 이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강 교수는 평양이 이번이 초행길이고 필자는 아직 평양에 가보지 못했다. 어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이북 전문가들 대다수가 아직 평양에 발을 디뎌보지 못한 채 코끼리의 일부분이라도 직접 만져본 장님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형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북 전문가가 왜 평양에서 그런 글을 남겼냐고 강 교수를 비난하지만, 필자는 20년이 넘게 학문의 대상으로만 삼았던 가깝고도 먼 땅에 첫발을 디딘 이북 전문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북 전문가가 평양에 발을 디딜 때 더 들뜰 수밖에 없는 현실, 이것이 바로 분단 57년의 비극이다. 만약 방남단에서 돌출행동을 한다면

사진/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사진공동취재단)

사진/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평양축전 참가자들.(사진공동취재단)

사진/ 평양 시민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평양축전 참관 방북단. 이번 방문기간중의 돌출발언 중엔 '반북발언'도 많았다.(사진공동취재단)

사진/ 현재의 상황이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을 방불케 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방북단이 돌아오는 김포공항에서 시위하는 보수단체 회원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