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 이대로 보내지 않아!
몸만 사용하는 원초적 매력 지닌 레슬링 퇴출
시청률만 보고 제3세계 무시하는 IOC 결정, 팬들이 뒤집어야
솔직히 레슬링을 잘 알지는 못한다. 많은 한국인들은 ‘제법 스포츠를 좋아하더라도’ 상당수 종목을 4년에 한 번만 즐긴다. 내 기 억 속 최초의 올림픽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 림픽이다. 그리고 내가 여섯 번의 올림픽을 보는 동안 레슬링은 ‘공기처럼 친숙했다’.
역사와 전통을 생각해본다면 레슬링은 한 국에서 존속을 원했던 ‘태권도 따위’와는 비 교도 안 된다. 태권도는 택견과 하나도 안 비 슷하고, 한국인 가라테 고수의 동작을 보고 ‘택견’이라 평했던 이승만을 위해 그가 만들 어낸 ‘날조된 국민무술’일 뿐이다. 물론 ‘역사 와 전통’이 전부는 아니고, 단지 그 근거만으 로 태권도를 무시하는 데에도 찬성하지는 않 는다. 역사가 긴 쪽이 더 좋은 무술이란 막연 한 환상은 한의학이 의학보다 우월할 거란 이상한 생각과 비슷하다. 리샤오룽(이소룡) 의 절권도가 중국 전통 무술보다 못한 건 아 니지 않은가? 태권도엔 나름의 독자성을 개 척해간 역사와 국제적 보급을 위한 노력의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레슬링에 견줄 만 한 수준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레슬링 관계 자들이 안이했던 것 같다. ‘지루한 게임’이라 불렸던 태권도는 퇴출당하지 않으려고 룰을 개정해 화끈한 스포츠가 되었다. 하지만 지 난 올림픽 때 레슬링은 너무 지루했다. 국제 올림픽위원회(IOC)가 지나치게 상업성을 추 구한다는 지적도 옳지만 퇴출 근거로 시청 률을 제시하는 이 상업적인 게임에 대해 레 슬링연맹이 역사와 전통만 믿고 지나치게 안 이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으로 보면 레슬링이나 태권도 같은 ‘투기 종목’은 분명히 ‘제3세계 스포츠’다. 이 는 올림픽 메달 개수를 최종 목표로 추구하 는 한국의 국가 스포츠 역사를 보면 가장 확 실하게 보인다. 투자 대비 효율이 좋은 투기 종목에서 메달을 따기 시작한 한국은, 지난 올림픽에선 유럽인이 득실거리는 펜싱과 같 은 비용이 많이 드는 스포츠에서까지 지분 을 가지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몸만 사용하 는 운동’이라는 그 원초적인 매력에 더불어, 이런 스포츠를 퇴출시키려는 것은 선진국의 횡포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래 서 나는 만일 한국인들이 ‘태권도를 지키기 위해’ 레슬링을 쫓아내는 데 찬성한다면 그 것을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부를 것이다.
결국 상황은 간단하다. 레슬링연맹은 IOC 가 핑계로 삼을 수 있는 사안들을 바꾸는 개 혁 조처를 제시해야 하고, 전세계의 레슬링 팬들은 IOC에 최종 결정을 다르게 내리도록 압박해야 한다. 스포츠팬들은 유럽인으로만 구성된 IOC가 내린 결정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레슬링, 이대로 보내지 않아!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어디 죽는 게 레슬링뿐이랴
프로선수 참가 여부 놓고 이미 드러난 올림픽 상업주의
원초적 특성만 강조한 ‘순진한’ 레슬링의 퇴출, 우리 삶과 닮아
스포츠를 취미로 하는 자와 직업으로 삼 는 프로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근대 올림픽 창시자로 알려진 피에르 쿠베르탱은 영국의 공립학교 교육이념을 올림픽에 도입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스포츠를 직업으로 하는 프로선수는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 담는 실천을 해낼 수 없는 존 재였다. 생계를 위해 스포츠를 하는 자를 용 납할 수 없었던 셈이다. 올림픽이 오랫동안 아마추어 간 경쟁이었고 프로가 배제된 이 유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그 이념과 룰은 바 뀌었다. 이제 올림픽 경기 중 프로가 출전할 수 없는 경기는 복싱뿐이라 한다.
프로와 아마추어 간 평등을 추구하려는 변화는 결코 아니었다. 더 많은 재미 말고는 이유가 없다. 더 많은 관중을 끌고 더 많은 돈을 챙기겠다는 계산의 결과다. 아마추어 정신 강조에서 프로까지 포괄하는 계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올림 픽이 이미 언제나 세상의 ‘주류’만을 강조해 왔다는 사실이다. 신사도를 강조하며 신사 가 아닌 체육노동자인 프로를 배제했지만, 체육노동자이던 프로가 신흥 엘리트로 바뀌 자 올림픽도 안면을 바꾸었다. 스포츠를 취 미로 하던 유한계급, 레저인만을 주류로 한 정하던 데서 돈과 명예를 누리는 신흥 엘리 트도 주류로 명명해준 셈이다. ‘건전한 신체 에 건전한 정신을’이라고 쓰인 멋진 깃발 아 래선 그 배제와 포섭의 꼼수가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말이다.
프로선수에 대한 제한, 뒤이은 제한 풀기 는 올림픽이 주류 경쟁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주류 에만 관심을 두는 올림픽 정신은 끊임없이 스캔들을 만들어왔다. 강대국 리스트가 바 뀌면 핵심 종목의 리스트도 바뀐다. 큰 돈줄 인 방송사의 요청에 따라 경기 시간도 바꾼 다. 텔레비전 시청률을 올릴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종목을 탈락시키기 일쑤다. 경 기 단체들은 올림픽의 최고 의사기구인 국제 올림픽위원회(IOC)의 주류 목록에서 탈락 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한다. 탁구공이 더 잘 보이도록 사이즈를 키우고, 유도복에 색 을 넣고, 여성 경기복을 더 짧고 섹시하게 보 이도록 하고…. 올림픽은 선수들의 기량 경 기장이라기보다는 종목들 간 인기끌기의 경 쟁터가 된 지 오래다.
레슬링은 순진했다. 올림픽 시작부터 지금 까지 생존해온 종목이고, 크게 바꾸어낼 수 도 없는 원초적인 경기라는 면을 내세워 순 진함을 오히려 더 강조했다. 트리플H, 언더 테이크, 존 세나, 얼티메이트 워리어를 데려 올 수는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원초적 이어서 주류가 될 수 없기에 자신들의 원초 성에 기대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너도나도 바뀌는데 우리라도 옛것을 지키면, 그래서 우리가 올림픽 상업주의의 알리바이가 되면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했을 수도 있다. 주류 중독인 IOC와 스포츠 상업주의를 물컹하게 보았다고 할까. 눈을 크게 뜨고 주류에 진입 하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몰랐다. 순진하면 죽고, 어리바리해도 죽고, 착해도 죽고, 곧이곧대로 해도 죽고, 아부하 지 않아도 죽고, 힘없어서 죽고. 레슬링은 매 일 파테르당하는 우리 삶의 표상이다.
원용진 서강대 교수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2012년 런던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6kg급에서 금메달을 딴 김현우 선수가 포효하는 모습.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고대 올림픽 종목인 레슬링을 퇴출시키기로 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려 논란이 일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