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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옥의 묵시록, 지옥의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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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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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돌아 진정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 ‘리덕스’ 버전… 코폴라 감독이 정신병자가 될 뻔한 뒷이야기

올해 칸영화제에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는 경쟁작 목록에 있지 않았다. 언론과 평단이 기립박수를 보낸 작품은 비경쟁작 부문에 초청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였다. 시간의 아이러니일까? 1979년 <지옥의 묵시록>이 칸의 경쟁작으로 초청됐을 때, 따지는 듯한 질문의 십자포화에 폭발한 코폴라는 극장을 따로 잡아서 개인적으로 가져온 다른 버전의 비공식 필름을 틀기도 했다. 그해 이 작품은 황금종려상을 탔지만 말 그대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베트남전 영화 아닌 베트남전 자체였다”

코폴라가 20년 이상 창고 안에 처박혀 있던 <지옥의 묵시록>의 러시필름(편집 전 상태의 필름)을 다시 꺼낸 건 어쩌면 정해진 운명의 수순이었다. 50분가량의 필름을 복원하고 재편집하는 과정은 20년 동안 그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영화생명을 갉아먹은 묵시록 망령을 털어버리기 위한 푸닥거리였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거대한 스캔들로 끝난 이 영화의 제작과정은 결국 그의 영화이력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고 그후 그는 ‘맛이 간’ 감독으로 찍혀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베트남전에 관한 영화가 아니가 베트남전 그 자체였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돈과 장비를 썼으며 영화를 찍으면서 모두 조금씩 미쳐갔다” 코폴라의 제작후기는 엄살이 아니었다. <지옥의 묵시록>은 말 그대로 재난영화였다. 14주를 잡았던 촬영기간은 14달로 늘어났고, 1600만달러의 예산은 3천만달러를 훌쩍 뛰어넘었다. 40년 만에 찾아온 큰 태풍은 거대한 세트를 부숴버렸고, 주인공은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도시가 불길 속에 가라앉는 걸 보면서 미소짓던 네로 황제처럼 미쳐갔다.

본래 <지옥의 묵시록>은 제작 준비중에 코폴라의 조수역할을 했던 조지 루카스가 맡으려던 영화였다. 저예산으로 이 영화를 준비하던 루카스가 <스타워즈> 대본에 몰두하자 코폴라는 이 작품의 감독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루카스의 거부를 묵살하고 영화를 빼앗은 코폴라는 이 작품이 하늘을 찌르던 자신의 위상을 산산조각내는 재앙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대부> 1, 2편과 <대화>의 성공으로 코폴라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전성기 때의 오슨 웰스나 할리우드의 제왕으로 군림할 당시의 스티븐 스필버그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상업성과 예술성 모두에서 ‘완벽한’ 감독이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쏟아지는 주변의 우려나 스티브 매킨,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로버트 레드퍼드로 이어지는 출연 거절도 그의 사기를 꺾지 못했다. 필리핀으로 촬영지를 결정한 뒤 코폴라는 이 지역에서 여러 번 영화를 찍었던 친구 로저 코먼 감독에게 전화했다. “당신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충고해줄 것 없어?” “내 충고는 단 한 가지야. 가지 마.” “이미 늦었어. 벌써 몇주 동안 사전작업까지 마쳤는걸.” “당신이 찍으려는 기간에 그곳은 지독한 우기야. 아무도 그 기간에 거기서 영화를 찍지 못해.” “그럼 비가 오는 영화가 되겠군.” 그는 자신만만했다.

주인공은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사진/ "우리는 너무 많은 돈과 장비를 썼으며 영화를 찍으면서 모두 미쳐갔다." <지옥의 묵시록>은 제작 과정 자체가 전쟁이자 재난이었다.
1976년 가족과 함께 도착한 촬영현장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조감독이 계속 바뀌었고, 수백명의 스태프들은 누가 현장의 지휘관인지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댔다. 첫 번째 문제는 윌라드 대위 역의 하비 카이틀을 도중하차시키면서 발생했다. 한달 동안 카이틀이 찍은 분량은 그 역을 맡게 된 마틴 신에 맞도록 개작되어야 했다. 마르코스 정부가 지원하기로 한 헬기들이 이슬람반군 진압에 투입되는 바람에 촬영일정이 지연됐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코폴라는 갈수록 난폭해졌다. 그의 부인 엘리는 그가 “사악한 커츠 대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면서 두려워했다. 이탈리아인 촬영감독은 여전히 파스타를 이탈리아로부터 공수해 먹는 한편 현지의 스태프들은 임금을 받지 못해 작은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점점 일이 꼬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대부>를 찍을 당시 겪었던 모욕을 떠올렸다. 그가 화장실에 있을 때 스태프 둘이 들어와서 이야기했다. “영화 전체가 완전히 쓰레기야. 멍청한 감독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자신이 있는 걸 알아치리지 못하도록 다리를 들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대부> 때의 두 스태프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다리를 들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을 때 태풍이 왔다. 140여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태풍이었다. 연일 폭우가 쏟아지고 스태프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흠뻑 젖은 침대에서 전전긍긍했다. 그러는 사이 완전히 침울해진 그가 <대부> 때 만난 포르노 여배우와 함께 호텔 안에 처박혀 있자, 화가 난 스태프들이 그의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코폴라를 호텔 수영장에 내던져버리기도 했다. 결국 태풍은 세트를 쓸어버리고 촬영은 무기한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몇달 뒤 다시 촬영이 재개되자 스태프들은 다시 그 악몽의 사지로 돌아가기를 꺼려했고 많은 사람이 실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돌아가길 꺼려했던 마틴 신은 “빌어먹을 놈들 다 미쳤어” 하며 욕을 해댔고 현장에서는 술에 절어 살았다. 일주일에 100만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받기로 한 커츠 대령 역의 말론 브랜도는 네달이나 늦게 현장에 합류했다. 그는 영화의 원작인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도 읽지 않았고, 살이 너무 쪄서 준비한 의상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코폴라는 브랜도에게 이 원작을 큰소리로 읽어주면서 몇날며칠을 허비해야 했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대기상태로 촬영 사인이 떨어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코폴라는 브랜도가 등장하는 마지막 신의 메가폰을 조감독에게 넘겨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를 완전히 엿먹인 브랜도에 대한 복수였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촬영지에서 최악의 사건이 또 발생했다. 마틴 신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것이다. 첫 장면을 찍기 위해 감독의 요구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틀 동안 방 안에 감금되는 등 혹사당했던 신이 쓰러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촬영작업는 끝나고, 그는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될 지경이었다. 결국 코폴라마저 쓰러졌다. 간질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고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진 그는 이미 40kg 이상 몸무게가 빠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죽어간다고 믿었으며 자기가 죽은 뒤 루카스가 영화를 마무리짓기를 유언하기도 했다. 묵시록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 돼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신은 빠른 속도로 회복해 영화에 합류했고 결국 238일의 촬영기간과 250시간 분량의 필름을 손에 안은 채 77년 4월 영화는 촬영을 마쳤다.

복권, 20년의 시간이 약이었다

사진/ <지옥의 묵시록:리덕스>에서 새롭게 삽입된 프랑스인 농장 에피소드.
촬영을 마친 뒤에도 코폴라의 착란상태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가 편집에 손을 놓자 후반작업 스태프들은 몇달 동안 아무 일도 없이 출퇴근만 반복해야 했다. 결국 후반작업에만 2년 넘게 소비됐고, 개봉시기도 연기에 연기를 거듭했다. 평단으로부터 자기도취적이라고 혹평받았던 결론부분에 대한 배급사와의 갈등 때문에 두 가지 버전으로 영화가 마무리됐다. 영화가 공개됐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촬영 뒷이야기 때문에 텍스트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촬영기간에 터진 악재를 올림픽 중계하듯 부지런히 퍼다 나른 방송은 코폴라와 ‘공동감독’이라는 소리를 들을 지경이었다. 그는 1400만달러의 빚만 떠안은 채 이 악몽에서 깨어나야 했다.

코폴라는 몇년 전 영국의 한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우연히 <지옥의 묵시록>을 보면서 리덕스 버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편집음향 전문가인 월터 마치 등이 합류해 완성한 리덕스 버전은 윌라드 일행이 킬고어 대령(로버트 듀발)의 서핑보드를 훔치는 장면과 플레이걸들과의 재회, 프랑스 농장 가족들과의 만남, 커츠 대령과 윌라드의 대화 등의 장면이 추가됐다. 리덕스 버전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 작품을 이제 신화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복권이 가능해진 데는 무엇보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준 진정효과가 있다. 이제서야 스캔들로부터 자유롭게 작품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너무 앞서갔던 이 영화의 감각이 이제는 수용가능한 것으로 평가받게됐다. 베트남전의 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미국사회의 거부감이 잦아든 것도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는 <지옥의 묵시록>의 새로운 버전이 아니다. 모두가 공모자가 되어 유기해놓고 있던 한 영화가 20년이 지난 뒤에야 제 손과 발을 제대로 맞춘 것이다. 2001년 관객들은 머나먼 길을 돌아 <지옥의 묵시록>의 완성형을 만나게 됐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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