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사관 관저 하비브하우스. 1972년 옛 대사관저가 붕괴 위험에 직면하자 미국 정부는 역대 미국 대사들의 100년 동안의 숙원이던 ‘서양식 건물’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했으나, 1971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한 필립 하비브는 ‘한옥 양식’을 고집했다. 그것이 한옥을 사랑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에서 펼쳐진 미국의 ‘역사’를 사랑한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이 건물은 미국의 재외 대사관저 중 주재국의 전통 양식을 취한 유일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전우용 제공
조선 정부가 루셔스 하우드 푸트에게 알선한 집은 경운궁 서쪽에 바로 붙은 민계호와 민영교의 집이었다. 민계호의 집은 건물 125간, 공대(空垈) 300간, 민영교의 집은 건물 140간, 공대 150간으로 둘 모두 당당한 저택이었다. 푸트는 이 집들을 2200달러에 구입했고, 주변 집도 몇 채 더 사들였다. 그가 이렇게 넓은 집을 만든 것은 묄렌도르프의 저택을 의식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을 구한 푸트는 본국 정부에 미국식 건물을 지을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하필이면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이유를 댔다. 국무장관은 ‘조선에서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답신했다. 조선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푸트는 ‘쓸 만한’ 건물들을 조금 수리해서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었다. 큰 건물 한 채는 공사관이 되었고, 다른 한 채는 공사관저가 되었다. 이듬해 미국 정부가 주조선 공사의 지위를 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 겸 총영사로 강등시키자 푸트는 이에 반발해 사직하고 귀국했다. 1887년 미국 정부는 집값과 수리비로 푸트에게 4400달러를 지급했다. 푸트의 뒤를 이어 조지 클레이턴 포크, 휴 A. 딘스모어, 오거스틴 허드 주니어, 존 M. B. 실이 이 집에서 공사 업무를 수행했다. 영국·러시아·프랑스 등 열강이 잇달아 유럽식 공관을 짓는 동안에도 미국 공사관과 관저는 한옥 건물을 그대로 유지했다. 선교사로 서울에 왔다가 미국 공사가 된 호러스 뉴턴 앨런은 을사늑약 이후 ‘미국 공사관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비해 초라한 것이 불만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건물에 돈을 쓰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술회했다. 가장 오랜 역사와 풍부한 스토리의 건물 을사늑약 이후 미국공사관은 영사관이 되어 1940년까지 미국인들과 미국에 유학하려는 조선인들을 지원했다. 1940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조선 내 미국인들을 다 쫓아내고 이 집을 압수했다. 해방 뒤 이 집은 다시 미국 총영사관이 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대사관이 되었는데, 1952년 을지로에 새 미국대사관이 준공된 뒤로는 대사관저로만 사용했다. 이후 역대 미국 대사들은 한국인들도 불편하다고 헐어버리는 한옥 건물을 수시로 개·보수해가며 꿋꿋이 버텼다. 1972년, 관저 건물이 붕괴될 조짐이 나타났다. 당시 미국 대사 필립 찰스 하비브는 끝까지 건물을 살려보려 했으나 이미 대들보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비브는 새 관저도 한옥 양식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1976년, 목재는 미국산 더글러스소나무를 쓰고 외관은 한옥, 내부는 양식으로 한 절충형 한옥 대사관저가 완공되었다. 하비브하우스 경내에는 공사관으로 썼던 한옥도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친 상태로나마 남아 있는데, 이 건물은 미국 재외 공관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관저 경내에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옛 정릉의 석물도 남아 있다. 지금 서울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풍부한 스토리를 간직한 건물은, 한국인의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것이다 역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