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이 사회과학에 미친 충격을 진지하게 다룬 과학생물학자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
태아가 자라는 자궁은 모성의 헌신 속에 새 생명이 움트는 성스런 곳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의 차가운 눈에 자궁은 ‘기생자’인 태아와 모체가 줄다리기를 벌이는 투쟁의 장으로 비친다. 실제로 태아는 태반에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 벽의 근육을 파괴해 동맥을 수축시키지 못하도록(그리하여 자신에게 오는 혈액이 줄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종종 임신부에게 고혈압을 일으킨다. 또 영양 공급원인 혈액 속 혈당량을 늘리려는 태아의 욕심 때문에 임신성 당뇨가 생기기도 한다.
‘죄수의 딜레마’게임이론은 틀렸다?
이런 갈등은 번식을 계속하기 위해 출산 뒤에도 살아남기를 원하는 모체와 자신에게 마지막 생명력까지 투여해주기를 바라는 태아 사이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아 생긴다. 모체와 태아의 유전자는 절반만 같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생존자는 내가 돼야 하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세계 생물학계에는 ‘이기적 유전자’ 돌풍이 불었다. 생물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서 보면 생물의 몸은 단지 한 세대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옮기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홍영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1993년)는 우리 독자들에게도 이 도발적인 단어를 낯설지 않게 만들었다.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신좌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1만5천원)는 유전자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책 제목처럼 이기적 유전자와 대조되는 이타적 유전자를 탐색하는 내용은 아니다. 원제 ‘미덕의 기원: 인간의 본능과 협동의 진화’(The Origins of Virtue: Human Instincts and the Evolution of Cooperation)에서 보듯 이 책의 초점은 유전자라기보다 인간이다. 그는 진화론과 유전학에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관심을 재빨리 심리학, 게임이론, 인류학, 역사, 경제 그리고 정치학으로 옮긴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과학이론을 쉽게 풀어놓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하버드대 인류학자 리처드 랭함이 평했듯이 “진화론이 사회과학에 미친 충격을 진지하게 다룬 첫 작품”이라는 데 있다. 저자는 지난해 베스트셀러 <게놈>을 펴낸 옥스퍼드대 동물학 박사 출신의 과학저술가이다.
리들리는 인간의 정신이 기본적으로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생존이 본질적으로 경쟁적 투쟁이라면 그토록 많은 협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언가”라고 묻는다. 그의 결론을 미리 알아본다면, 인간은 이기성과 함께 협동과 신뢰를 지향하는 사회적 본능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이란 생물종을 성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힘을 발휘하는 사회에서는 ‘죄수의 딜레마’가 판친다. 두명의 죄수 가운데 어느 한 사람만 자백을 하면 그는 즉시 석방되고 다른 사람은 10년형을 받는다. 둘 다 자백하면 모두 5년형이다. 그러나 모두 입을 다물면 각각 2년형에 그친다. 결과가 어떻게 될까. 정답은 두 번째로 둘 다 5년형을 받는다. 상대가 배신할 것이라면 나도 배신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협동력, 그러나 호전성
그러나 이 게임이론은 틀렸다고 리들리는 말한다. 그는 인간사회에 더욱 잘 들어맞는 ‘흥정게임’을 제시한다. 현금 100만원을 철수에게 주고 영희와 나눠 가지라고 주문한다. 영희에게 얼마를 줄지는 철수가 정해야 하는데, 영희가 그 제안을 거절하면 돈을 한푼도 받지 못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영희가 수긍하면 제안한 대로 돈을 나눈다. 먼저 이기적으로 따져보자. 철수가 99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1만원만 영희에게 준다면 어떨까. 영희로서는 한푼도 못 받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수긍할 것이다. 실제 실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철수’는 5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자기 이익뿐만 아니라 공평성도 고려한 것이다. 신뢰와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다. 물론 익명성을 보장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게임을 변형하면 게임 참가자는 훨씬 치사하게 바뀐다.
이기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동과 이타주의가 오히려 유력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 리들리가 사회성 동물들의 진화에서 얻은 교훈이다. “내 등을 긁어주면 언젠가 나도 네 등을 긁어준다”는 실속있는 거래이기도 하다. 흡혈박쥐는 ‘협동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 이 박쥐는 하루 필요량 이상의 피를 빨아두었다가 남는 것을 토해내 다른 박쥐에게 나눠주곤 한다. 만일 잔머리를 굴리는 약은 박쥐가 있어서 남의 먹이를 얻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다면 가장 이익이 아닌가. 반대로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하는 이타적 박쥐는 도태될 것이다. 바로 죄수의 딜레마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흡혈박쥐의 수명은 8년으로 꽤 길고, 누가 자기에게 자선을 베풀었는지를 기억해두었다가 보답을 한다. 게다가 피를 언제나 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어려운 때를 대비해서 아량을 베푸는 쪽이 현명한 것이다. 흡혈박쥐는 인간처럼 몸집에 비해 뇌가 매우 크다. 호의를 보인 상대를 기억하고 배은망덕한 이웃에게 유감을 표시하려면 두뇌가 발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초에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협동하는 법을 깨쳤고, 믿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고, 스스로 믿을 만한 사람임을 과시해 좋은 평판을 쌓고, 재화와 정보를 교류함으로써 노동분화를 이루는 소양을 타고 났다고 리들리는 결론짓는다. 이것이 인간이란 생물종이 진화에서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다.
협동성이 강하다는 게 항상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집단주의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를 연구한 제인 구달은 침팬지의 가족애와 평온함, 도구사용 등을 인상깊게 보고했지만, 동시에 끝없는 전쟁과 유아살해, 잔인성에도 혀를 내둘렀다. 침팬지와 가장 가까운 인간도 지구상에서 가장 협동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호전적이고 분파적인 생물이기도 하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휘저으며…
이 책이 독창적인 것은 무엇보다 ‘두 문화’의 벽을 넘나든다는 것이다. 자연과학도인 필자는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겁없이’ 휘젓는다. 루소와 홉스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진화생물학을 무기로 과감하게 절충시킨 것은 그 성과이다.
그는 또한 진화론과 고생물학의 증거를 들이대며, 자연을 무턱대고 미화하고, 원주민의 자연친화적인 삶에 대한 환상을 열심히 전파하는 환경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류에게 본능적인 환경윤리 같은 건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계발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본성에 대한 분석에 그쳤어야 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결론삼아 착한 인간본성의 회복을 위해 공공 관료정치를 대대적으로 해체해 신뢰와 미덕에 기초한 공동체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정치론은 아마추어처럼 읽힌다.
그러나 인간본성에 관한 거창한 메시지가 아니라도, 흡혈박쥐의 피나눔 의식에서부터 주먹코돌고래의 섹스에 이르는 풍부하고 흥미로운 진화생물학적 사례는 이 책의 일독을 보상해준다.
조홍섭 기자/ 한겨레 과학전문 ecothink@hani.co.kr
1960년대 중반 세계 생물학계에는 ‘이기적 유전자’ 돌풍이 불었다. 생물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에서 보면 생물의 몸은 단지 한 세대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옮기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홍영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1993년)는 우리 독자들에게도 이 도발적인 단어를 낯설지 않게 만들었다.

사진/ 박쥐 등 사회성 동물들의 진화는 상호협동에 기반해 이뤄져 왔다.

사진/ 인간은 가장 협동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호전적이고 분파적인 생물이기도 하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