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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죽음의 국경을 넘나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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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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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시대, 통일 위해 헌신한 해방정국 남북협상파 재조명 절실

(사진/남북연석회의 대표자들의 귀한을 환영하여 찍은 한독당 기념사진)
남북한 이산가족의 역사적 상봉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사람들의 감격이 모두 같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많은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감동의 순간에 파묻힌 채, 맺힌 한을 안으로 삭였을 터이다.

냉전에 가려져 연구 미미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50여년 전 이 땅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런 피를 토하게 하는 이산가족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서 가정은 덧없는 것이겠지만, 실제 해방 직후 남북으로 갈리는 나라를 하나로 다시 합치고자 목숨을 바쳤던 이들이 있었기에 더욱 그런 아쉬움이 크다. 이른바 해방정국의 남북협상파들이다.


그들은 해방과 함께 남북으로 갈라지고 있던 남과 북이 다시 하나로 합쳐져 진정한 독립을 이루도록 몸을 던졌던 인물들이다. 외세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분단선을 구축하던 당시 원한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사선을 넘나들며 목숨을 걸고 민족단결과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다. 서로 갈라지고 있던 남과 북이 합치도록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양쪽을 넘나들면서 가교역할을 했다. 비록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중요하다.

그러나 분단 이후 지금까지 이들 남북협상파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거의 멈춰 있었다. 우선, 냉전 이데올로기가 워낙 강한 분위기에서 이들 남북협상파들에 대한 연구를 기피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이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하려 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용공세력으로 간주된 것이다. 거기에다 우리 학계는 어떤 사안에 있어 가장 정점에 섰던 인물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김구를 제외한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우사 김규식의 경우에도 최근에야 그의 사상과 업적을 집대성한 연구서가 발간됐을 정도다.

북한에서도 이들은 역시 연구대상이 아니었다. 그동안 북한에서도 박헌영과 허헌 등 남로당 계열은 거의 무시돼 왔다. 남한보다는 빨리 이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9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최근 남북정상회담 등 화해분위기를 맞아 이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조명 필요성이 학계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 이들이 성공했더라면 남북 분단과 같은 역사의 질곡이 없었을 것이기에 이들의 선구적 노력을 더욱 되새겨볼 필요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김구나 김규식 등의 거물들을 도와 당시 남북협상 실무를 맡았던 주역들인 중간급 활동가들은 거의 잊혀진 상태여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북협상파들이 해방정국 당시 평화적 통일국가 수립운동으로서 주도했던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는 해방 뒤 처음으로 남북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한 곳에 모인 자리였다. 특히 이념과 종교의 차이를 넘어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구국대책을 토의한 역사적인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남북 양쪽에서 56개 정당 사회단체와 695명의 대표가 참여했다. 남한에서는 남로당을 비롯해 인민공화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민주한독당, 근로인민당, 근로대중당, 농민당, 한국독립당, 청우당 등의 정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민중동맹, 민족자주연맹, 문화단체총연맹 등의 직능·사회단체들이 참여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남녘에서 참가한 민족주의계열 주요 인사로는 한국독립당의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최봉석 등이,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원세훈·손두환·최동오·권태양·배성룡·신철규·이병희·여운홍·김시겸, 민주독립당 홍명희·하만호·김창엽·김무림 등이 있었다.

파벌과 지향성을 떠난 다양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이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는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민족지도자들의 ‘구국의 결단’으로 성사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부 명망가의 서한 왕래만으로 개최된 것도 아니었다. 남북과 좌우를 잇는 데 앞장섰던 김구를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과 함께 막후에서 실무를 맡아 일을 진행했던 당시의 젊은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모임이었다.

이미 1947년 이후에는 남과 북 양쪽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던 상태였고 실제로 38선을 넘으려던 사람들이 총탄에 목숨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젊은 애국지사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남북을 오가야 했다. 또한 중도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남과 북, 좌와 우 양쪽을 잇는 일은 더욱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회의, 불신을 넘어

(사진/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개원식에 참석한 김구와 김규식)
이 가운데 권태양은 1946년 이후 김규식의 측근으로 좌우합작위원회 서무부장, 민족자주연맹 비서처 총무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인물로서 연석회의를 성사시킨 이였다. 그는 동족상잔이 예견되는 절박한 시점에서 38도선 획정 이후 최초로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경근과 함께 민족진영의 대표로 북녘을 방문했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을 두 차례 직접 만나서 남북연석회의를 성사시키는 데 온힘을 쏟았다.

권태양처럼 남북과 좌우의 통일에 헌신했던 중간간부급 활동가로는 근로인민당 최백근, 민주독립당 강병찬, 한국독립당 안우생, 삼균청년동맹 김흥곤 등이 있다. 이들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을 남북으로 나눠 미소양국이 신탁통치하기로 한 결정에 대응해 ‘선 임시정부 수립, 후 신탁문제 해결’을 주창했다. 민족 내 좌우분열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좌익세력의 견제와 미군정의 방해에 맞서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성립시켰다. 1947년 후반기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남북협상을 추진해나갔던 남한 내 운동역량도 이들을 통해 다져졌다. 남북의 통일은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남과 북이 불신과 대립을 없애고 민족적 합의를 할 수 있도록 양쪽 모두를 설득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중도파의 입장을 북쪽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전남 광양 출신의 최백근은 38선을 넘나드는 위험한 임무에 나서는 동시에 당시 여럿으로 나뉘어있던 남쪽 중간파 세력을 하나로 뭉치는 작업에도 주력했다. 강병찬은 경남 진양 태생으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자기가 참여할 수 있는 조직에는 모두 참여해서 통일정부를 수립시키고자 활동했던 ‘정치적 팔방미인’이었다. 그가 관여했던 정당·단체로는 조선건민회, 민중동맹, 민주독립당, 근로인민당, 민주한독당 등이었다. 그는 1947년 11월 홍명희의 편지를 휴대하고 북로당 지도자들과의 정치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1948년 2월 초 홍명희를 따라 눈덮인 38선을 넘기도 했다. 당시 홍명희는 백남운, 조소앙, 여운홍, 유림, 김구를 만나는 한편 같은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등을 접촉하면서 남북정당사회단체의 연석회의 개최분위기를 잡아나갔다. 강병찬 역시 홍명희와 함께 민족자주연맹계 중간간부들을 폭넓게 만나면서 남북한간의 민족단합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의 남북협상은 김구, 김규식 등 남쪽의 정치인들이 참가했지만 주체는 역시 북한당국이었다. 남한에서는 아무래도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동적 역할을 했다. 연석회의의 성공적 실현을 위해서는 북한당국과 남조선민전 사이의 연합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이 준비를 했던 실무자가 신경식이다. 그는 두 차례 월북해서 북쪽 공산주의자들과 협조하는 데 주력하면서 연락책임자로서 남쪽에서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38선 월경루트를 지정해 주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김구나 김규식 등 우익정당 거물 인사들은 반공개적으로 혹은 거의 공개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밖의 좌익정당이나 중간정당의 대표들은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암호를 사용하며 그들이 38도선을 넘게 해주기도 하였다.

통일에 앞서 그들을 기억하자

(사진/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권태양,여운형,송남헌,엄항섭)
그러나 남과 북, 좌와 우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그들의 노력은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거물급 인사들에 대한 평가 뒤에 이들의 분단 극복 노력은 오늘날까지 묻혀진 역사였다.

남북통일을 이루는 데는 남북 양쪽 정상의 역할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만이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중간 실무자들의 헌신적 노력과 국민 모두의 지지와 성원이 보태져야만 이 비극은 끝나고 평화통일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어지러운 해방공간을 뚫고 남북통일을 꿈꿨던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재조명은 더욱 절실하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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