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무위 이곳에 탄원
등록 : 2012-08-21 14:36 수정 : 2012-09-05 16:54
오늘 나는 릴케의 근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로 하여금 <로댕론>(1902)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게 한 그 감정이 근심이 맞는다면 말이다. “유명해지기 전에 로댕은 고독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이 찾아온 뒤에 그는 어쩌면 더 고독해졌는지도 모른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모여드는 온갖 오해들의 총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릴케는 그 뒤에 바로 낙관적인 말을 덧붙였다. 로댕의 위대한 작품들이 결국 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오늘 나는 릴케의 그 낙관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진은영이 예전에도 고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최근 2~3년 동안에 그는 더 유명해졌다. ‘정치’나 ‘실천’ 같은 말이 자주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몇 년 동안 보여준 지성과 용기를 보건대 이는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그가 늘 오해만 받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으리라. 그러나 그의 시는 더 고독해졌을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그의 당당하고 예리한 산문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들에 대해서도 말했으면 싶었다.
시가 물리적 의미에서 가장 ‘순수’해졌을 때 시에서는 시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때 시는 누구 것도 아니고 그저 언어의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쓴 시다. 말라르메를 따라서 이것이 시의 가장 지고한 경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진은영이 이 시집에 인용한 프랑스의 비평가 블랑쇼의 생각도 그렇다. “시적인 말은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서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어느 누구가 아니다. 오히려 말 홀로 스스로를 말하는 것 같다.”(<문학의 공간> 2부)
나는 이것이 시의 빛나는 한 경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지고한’ 경지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시를 사랑하는 다른 많은 이유들을 쓸쓸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시인 진은영을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저 ‘무위’(無爲, desœuvrement)의 언어로 쓰이는 시, 혹은 시의 목소리만이 울려나오는 시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용산의 목소리, 4대강의 목소리, 죽은 김남주와 산 김진숙의 목소리, 두리반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의 목소리.
그런데도 그 결과물은 언제나 아름답다. 다른 시에서는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직유들을 그는 어린아이가 과자를 흘리듯이 한 편의 시 안에 아무렇게나 흩뿌려놓는다. 그가 제아무리 헌신적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의 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존경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질색하고 시에서 그 가치를 수상쩍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얻은 것들에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1920)에서 천사는 폭풍에 떠밀리듯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저항하듯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베냐민은 진보라는 신화를 맹신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천사가 아니라, 파국에 파국을 거듭하는 중인 역사를 우울하게 ‘돌아보는’ 천사를 봤다. 그리고 그 천사에게 ‘역사의 천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 하나를 상상해본다. 그 그림에서 천사는 천상으로 떠밀리듯 날아오르고 있지만 필사적으로 지상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가 가장 순수해져도 좋은 때에 그의 언어는 무위의 언어다. 그것이 천사를 하늘로 밀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지상을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천사의 언어는 탄원의 언어가 된다. 그 언어가 그를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천사는 중간에 있다. 밀어올리는 힘과 끌어내리는 힘 사이에서, 상승이기도 하고 하강이기도 한 날갯짓으로, 무위와 탄원의 언어를 함께 말하면서, 천상과 지상의 중간 어디쯤에 떠 있는 천사. 그 천사의 이름은 ‘시의 천사’일 것이다. 이 시집 <훔쳐가는 노래>(창비)에는 그 천사가 깃들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