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도쿄올림픽 당시 여자육상 400m 세계신기록을 갖고 있던 신금단 선수도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북한이 솬다. 북한이 선수단을 철수했기 때문이다. 1962년 소련 모스크바 육상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손을 흔드는 신금단 선수. 한겨레 자료
이 사건은 헝가리 선수들에 의해 ‘사전 모의’됐다. 그들은 경기 전에 러시아어로 소련 선수를 도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기가 정치적이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1956년 올림픽 직전 소련은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침공했다. 자도르는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딴 뒤 미국으로 망명 신청을 했다. 스포츠맨십과 올림픽 정신에 따른다면 두 사건 모두 엄중히 처벌돼야 한다. 그러나 당시 IOC는 메달 박탈과 같은 제재를 할 수 없었다. 냉전시기 IOC의 주도권이 서방 진영에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IOC의 올림픽 정신이 현실정치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북한과 인도네시아는 대회를 앞두고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IOC가 인도네시아가 주도한 신생국대회(GANEFO) 출전 선수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해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OC의 처지에선 올림픽과 유사한 정치적인 대회를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IOC는 1980년 ‘자유의 종 대회’(Liberty Bell Classic)에 참가한 29개국 선수에 대해선 어떤 제재도 하지 못했다. 이 대회는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한 미국에 의해 창설됐다. 명백하게 정치적인, 유사 올림픽 대회였다. 마찬가지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을 보이콧한 동구권이 ‘우정 대회’(Friendship Games)를 열었을 때도 IOC는 허수아비 신세였다. IOC 자체가 정치적 중립을 잃었던 역사도 있다.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검은 장갑 경례’로 자국의 인종차별에 정면으로 항의했다. 에이버리 브런디지 당시 IOC 위원장은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오염돼선 안 된다”고 이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브런디지 자신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 ‘나치식 경례’를 했던 친나치 인사였다. 박종우를 포함한 앞의 사례들에 적용되는 올림픽 헌장 조항은 51조 3항이다. 바로 위의 51조 2항은 “경기장 내 상업광고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물론 올림픽 경기장 내에선 상업광고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올림픽이 상업성과 무관한 순수한 스포츠 제전이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올림픽은 상업성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정치와도 혈연관계를 유지해왔다. 오늘날 올림픽의 인기 원천이 ‘국가 간 경쟁’에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IOC는 늘 현실주의 태도 취해와 박종우의 동메달은 과연 박탈될 것인가. 행위 자체로 본다면 처벌 가능성은 앞의 사례들보다 크다. 인접 국가 간 영토 분쟁은 냉전시기의 동서 대립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비해서는 사소하다. 1980년의 ‘주먹 감자’보다 덜 외설적이고 1956년의 ‘혈투’보다 덜 폭력적이지만, 1968년의 ‘검은 장갑’이 제기한 인권 문제보다는 덜 보편적이다. 다른 해석의 여지도 많지 않다. ‘시범 케이스’로 걸리기에 딱 좋다. 그럼에도 IOC가 메달 박탈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다. IOC는 스포츠가 정치에 오염되는 걸 두려워한다. 메달 박탈 자체가 한·일 양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셈이 된다. 여기에 한국은 IOC의 현재와 미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일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1964년의 북한이나 인도네시아보다는 큰 시장이다. 정치와 경제 문제에서 IOC는 늘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