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평론가들이 불붙인 창비비판…진보의 상징에서 권위주의와 상업주의의 냄새가
한국에서는 진보적 지성이 숨쉬기 힘들다고 개탄하는 지식인들을 반박할 만한 자료가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의 발행부수다. 문학잡지나 시사계간지들이 5천부를 소화하지 못해 허덕이는 요즘도 창비의 발행부수는 2만부에 육박한다. 한때 10만부를 넘나들던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적 비평지 <세카이>나 영국의 <뉴레프트 리뷰>조차 1만부를 넘기지 못하는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도 창비의 선전은 놀라운 것이다.
“백낙청씨는 하나의 정부다”라고 했던 한 문인의 말마따나 백씨가 스물여덟의 나이로 창간한 창비는 엄혹한 70∼8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한국지성사에서 하나의 정부이자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잡아왔다. 99년 겨울부터 문단을 뜨겁게 달군 문학권력 논쟁의 화살이 유일하게 창비를 비껴간 것도 창비가 오랜 세월 지녀온 권위의 진정성에 대한 두터운 신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1년 오늘, 우리 사회의 진보를 대표하는 창비의 진정성은 유효한가.
<마이너리그>가 ‘창비적’인가
계간 <사회비평> 2001년 가을호는 ‘<창작과 비평>의 정체성을 묻는다’는 제목의 특집을 마련했다. 그동안 <인물과 사상>의 강준만씨를 비롯해 몇몇 비평가를 중심으로 간헐적인 창비 비판이 있어왔지만 진보의 성역에 가까웠던 창비를 논쟁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면에서 <사회비평>의 비판적 분석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번 비판의 사수는 문학권력 논쟁에서도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해온 젊은 평론가 권성우 교수(동덕여대)와 이명원씨다. 권씨는 최근 창비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진보상업주의와 진보권위주의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당대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던 창비의 지면이 안티조선 논쟁, 문학권력 논쟁 등 최근 지식인사회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창비의 편집진들이 현재까지 축적된 창비의 상징권력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권위주의와 지적 태만이 이른바 창비의 2세대 평론가들에게서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 권씨의 생각이다. 그는 이명원씨의 평론집 <타는 혀>에 대한 창비 편집위원 임규찬씨의 비평이 냉소적 편견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임씨의 비평집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에 대한 천양희 시인의 서평이 칭찬과 감탄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을 비교하면서 “서평의 예상되는 방향을 고려하여 서평자를 선택하는 것도 편집진의 권한일 터이므로, 임규찬의 비평집이 아무리 그 자체로 탁월한 성과라 하더라도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창비의 편집진에 대한 신뢰를 결정적으로 훼손시키는 행위”라고 따끔하게 질타한다.
권씨가 지적한 진보권위주의에 ‘기회주의’라는 강도높은 단어를 추가시킨 이명원씨는 출판사 창비의 방향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씨는 진보적 문학출판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창비가 90년대 이후 다른 문학출판사와 어떠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가 묻는다. 70년대 황석영과 이문구, 80년대 김하기와 방현석, 공지영 등 빼어난 작가들을 발굴했던 창비가 다른 매체를 통해 상품성이 검증된 작가들의 조명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에 따르면 근래 들어 창비가 집중조명하고 있는 신경숙이나 은희경 등의 작가들은 그들의 작가적 역량을 떠나 문학적 관점이 창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같은 작품이 창비에서 출판된 것은 노골적인 장삿속의 반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몇달 전 창비에서 나와 베스트셀러에 오른 <마이너리그>는 이씨뿐 아니라 다른 평론가들이나 출판전문가들의 비판의 도마에 올랐던 작품이다. 출판전문지 <송인소식> 7월호 대담에 참여했던 <출판저널> 전 편집장 이권우씨는 “은희경씨의 작품세계와 창비가 지금까지 보였던 문학관이 일치하는지 의심스럽다”며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수용하는 창비의 포용력이 과연 민족민중문학을 하고 있는 작가들, 특히 남성작가들에게도 미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명원씨는 “창비가 진보적인 문학출판사라는 권리는 누리면서, 이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그것은 창비가 오만한 출판-문화권력에 포섭돼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는 일이 될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창비마저”라는 단서
두 젊은 평론가들의 문제제기는 도발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평론가 김명인씨는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해도 명백하게 색깔이 다른 세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서 비슷한 평가를 받는 현상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면서 “오랫동안 문단과 사회전반의 논쟁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창비가 최근 이런 문제들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이권우씨의 비판은 좀더 직설적이다. 그는 “90년대 이후 문학출판가의 대세는 상업성이었고, 창비 역시 예외일 수는 없겠지만 믿었던 창비마저 자사 출판물에 후광을 입히는 작업에 평론가들이 나서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자 창비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의 말대로 창비 역시 책을 팔아서 운영해야 하는 출판사의 하나인 이상, 상업성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창비쪽도 이러한 비판에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창비의 김이구 편집장은 “변하는 세상에서 창비가 나아갈 길 또한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면서 “매체환경도 다양해지고, 작가들의 성향도 이전과 달라진 마당에 창비에 70∼80년대와 같은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답했다. 그러나 일개 출판사로 가지고 있는 점유율과는 별개로 창비가 가지고 있는 한국문학의 대표성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창비에 거는 기대와 요구는 억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창비가 큰 그림을 그리면서 전략을 짜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출판산업 전체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씨는 “70∼80년대 시인 김용택이나 소설가 홍희담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들였던 공을 다시 되새겨볼 때”라면서 “창비마저 젊은 작가들은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하려는 노력없이 이미 익은 과실만 따먹으려고 한다면 문학출판은 더욱 양극화되고 결국 시장 자체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한씨의 말에도 드러나듯 많은 이들이 창비에 대한 우려섞인 비판을 하는 데는 “창비마저”라는 단서가 붙는다. <사회비평>에 기고한 두 필자 역시 비판의 전제를 30년 이상 창비가 쌓아온 도덕성과 진보성에 기대고 출발한다. 70년대 숱한 판금조치와 80년 강제폐간이라는 정권의 폭력과 싸워오면서 한국문학과 사회를 성숙시켜온 창비의 공적은 어떤 칼날로도 부정될 수 없다. 어느 출판인의 말대로 창비는 “사라져야 할 아버지가 아니라 이제는 변하는 모습을 기대하게 하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아버지”인 것이다.
<사회비평>은 가을호 편집자의 글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비판적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 특집을 마련했다”고 적고 있다. 66년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타종을 울린 창비의 창간사는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창비의 창간정신이 퇴색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창비가 2000년대에도 유효한 진보의 거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이제 창비가 대화에 나서야 할 차례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사진/ 이명원씨는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등 최근 창비의 출판 행태가 창비의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진보적 상업주의로 규정했다.(한겨레21)

사진/ 권성우씨는 창비가 최근 지식인사회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축적된 상징권력을 고나리하고 보존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한겨레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