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주앙>의 드마르코와 미클러, <5번가의 폴 포이티어>의 폴과 위사
판타지는 현실과 경쟁하려 들지 않습니다. 위협을 느끼고 조바심을 내는 것은 언제나 현실쪽입니다. 사람들은 ‘예술’이라는 울타리 속에 판타지를 한꺼번에 격리 수용하려 들고, 어쩌다 그 울타리를 넘어 일상 속까지 침투한 판타지에는 ‘광기’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조니 뎁과 말론 브랜도가 공연한 영화 <돈 주앙>(Don Juan Demarco)은 섹스를 주제로 삼은 영화가 아닐까 싶은 제목을 지니고 있지만 실은 우리 삶에서 판타지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스스로를 신화적 바람둥이 돈 주앙이라고 믿는 스물한살의 청년 드마르코(조니 뎁)는 자살을 기도하다가 미클러 박사(말론 브랜도)의 설득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술탄의 하렘에서 1500명의 후궁과 사랑을 나눴다는 드마르코의 진술이 사실이건 아니건, 확실한 것은 그에게 ‘사랑의 마에스트로’다운 마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를 ‘공주’라고 믿는 동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가 다락방으로 쫓겨난 뒤에도 품위와 카리스마를 잃지 않듯 말입니다. 여자 간호사들은 하나같이 드마르코에게 넋을 잃고, 우락부락한 남자 간호사마저 오래지 않아 그에게 라틴댄스를 배우죠. 사람들은 마치 진귀한 적포도주를 대하듯 젊은 몽상가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십니다. 은퇴를 앞두고 그의 스쳐간 삶의 희열을 아쉬워하는 미클러 박사 역시 그들 중 하나지요. 그는 돈 주앙의 망상을 치료하는 거기에 몸소 감염되는 쪽을 택합니다. 어쩌면 그 행위는 판타지를 늘 질병으로 명명하고 약물을 투여해온 평생에 추신처럼 붙이는 일종의 사과였는지 모르지요.
판타지는 현실에 당돌한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는 구실을 하지요. <5번가의 폴 포이티어>(6 Degrees of Separation)에서 뉴욕 상류층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 것은 명배우 시드니 포이티어의 아들을 자처하는, 일종의 정체성 장애를 앓는 떠돌이 청년(윌 스미스)입니다. 자칭 폴 포이티어라는 이 젊은이는 아이들을 하버드에 보낸 뉴욕의 부잣집을 순례하며 아들딸의 친구라면서 저녁을 함께하고 지적인 대화를 나눈 뒤 사라지지요. 폴이 부유한 중년들로부터 훔친 것이라고는, 하룻 저녁의 환대와 고급스런 라이프 스타일의 향내뿐입니다. 주인들은 뒤늦게 속았다고 분개하지만 도난품도 피해도 없으니 속수무책이지요. 그들의 분노는 이 매력적인 청년에게 반한 자신의 마음에 대한 당혹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하나인 미술품 중개인 부인 위사 키트리지(스토커드 채닝)는 폴과 그의 외로움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을 쏟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설명하지요. “그 애는 우리처럼 되길 바랐고 우리가 가진 것을 원했어요.” 폴과의 잊지 못할 만남이 상류사회의 심심파적 잡담거리가 되는 풍경에 위사는 진저리를 칩니다. “우린 그 애를 저녁 식탁 화제를 때우는 ‘에피소드’로 만들었어요. 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일화나 농담으로 만들지 않은 채 삶의 일부로 간직할 수 있지요?”
요컨대 위사와 미클러 박사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고여 있는 삶에 번식하는 곰팡이였던 셈입니다. 궤도 밖의 세계를 한 자락도 일상 안으로 청해 들이지 못하도록 옥죄는 현실의 소심함 말입니다. “상상은 우리가 현실 세계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돕는 패스포트”라는 폴의 말대로, 건강한 현실이라면 판타지에도 괴담에도 농담에도 창을 열어둘 수 있어야겠지요.
필름누에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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