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은 스포츠 뉴스만으로도 충분한가. 그렇다면 이 지면을 건너뛰어도 좋다. 결과만 알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올림픽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원한다면 오는 8월13일에 각국 최종 순위를 문자로 찍어주겠다. 10초 안에 끝나는 육상 100m나 그보다 짧게 끝나는 다이빙의 입수, 혹은 초고속 카메라로도 잡을 수 없는 사격 선수의 탄환이라 할지라도 스포츠는 ‘과정’이다. 그 감각의 혈맥을 짚어본다.
원시성
스포츠(Sports)란 ‘전환하다’는 뜻의 중세 영어 ‘Sporten’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단순히 기분 ‘전환’을 뜻하는 게 아니라, 위계질서의 일상을 제의와 놀이의 순간으로 전복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스포츠는 원시 상태로 역주행한다.
육상이 대표적이다.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며 달려가는 건각의 스피드로 인해 순식간에 우리는 최대치의 흥분에 도달한다. 특히 400m 계주는 네 명이 길쭉한 타원형을 이어달린다는 점에서, 적으로부터 긴급한 도피나 큰 짐승을 공격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트랙이나 필드의 수많은 개인 종목과 달리 계주는 단체 종목이다. 네 주자는 빈틈없이 릴레이를 해야 하고 동시에 옆 라인 선수들의 실수를 기대한다.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벌어지는 바통 터치 실수는 메달의 꿈을 좌초시킨다. 그나마 다행이다. 고대였다면 적의 창에 찔려 죽었을 것이고, 원시였다면 멧돼지의 만찬이 되었을 것이다.
1954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의대생 로저 베니스터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1마일(1609m) 4분 이내 주파’를 이뤘다. 곧 1년 안에 37명이 그 기록을 깼고, 그후로는 4분 이내 주파가 상식이 되었다. 그는 유년 시절 달리기를 처음 하던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지표면이 나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달리고 있었으며, 신선한 리듬감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결코 존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힘과 아름다움의 새로운 근원, 그 근원을 발견했다.” 그 후예들이 지금 런던 스트래퍼드 스타디움에 들어서고 있다.
우연
1924년, 기차 여행 중이던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은 육중한 기차와 쭉 뻗은 레일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성급한 교합처럼 울려대는 불규칙한 소리에 영감을 얻었다. 쿵쾅대는 마찰음은 그에게 <랩소디 인 블루>를 선물했다. 스포츠 또한 그런 우연과 즉흥으로 이뤄진다. 만약 스포츠에 우연이 없고, 따라서 강자는 반드시 승리하도록 되어 있어서 즉흥의 변주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면, 스포츠 뉴스만 봐도 족하다. 스포츠가 결과보다는 과정의 미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격투기 종목이 우리에게 주는 쾌감은 그 링이나 매트에서 누군가가 한 대 얻어맞고 일어나지 못하는 극단적 공격성 때문이 아니다. 과정의 드라이브에 동반해 선수들의 땀방울을 함께 느끼며 고도로 감정이입이 된 순간, 엎어치기 한판승이나 어퍼컷 다운이나 태권도의 돌려차기가 작렬한다. 그 순간만 편집한 하이라이트는 우격다짐의 몸싸움이지만, 거의 맨몸으로 서로를 의지하면서 동시에 밀어내야 하는 선수들의 과정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우연성과 그것을 자기 스타일로 드리블해나가는 즉흥 변주곡을 만나게 된다. 태권도, 유도, 복싱, 레슬링이 이번 대회의 격투기 종목이다. 팀 플레이가 아니라 개인 종목이며, 그것도 숨가쁘게 다양한 동작이 교차한다. 상대의 움직임과 자기 움직임 사이의 우연적 요소를 기민하게 포착해 그 순간에 즉흥 변주를 온몸으로 연주해야 한다.
기록
122년께 로마의 전차 경기 명수 가이우스 디오클레스는 전차 경기에 4257번 참가해 그중 1462번 우승, 861번 준우승, 그리고 576번 3등을 남겼다. 나는 전차 경기가 트랙을 어떤 방식으로 몇 번 회전해 등수를 가려내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기 장면을 떠올릴 뿐이다. 스포츠 사회학자 앨런 거트만도 디오클레스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고대인들은 ‘기록’하려 했다. 근대적 시간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던 로마인들은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보다는 얼마나 많이 참가했는가를 기록했다.
선수나 팀의 세부 기록을 일일이 남기고, 또한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마법과 주술에서 계몽과 합리로 진화한 근대 서구에서 ‘기록’은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이뤄졌다. 축적된 수치에 따른 계량화는 근대 사회과학의 정수였다. 미디어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까지 근대 스포츠도 계량과 기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록보다는 상대와의 경쟁을 통해 승패를 판가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양궁이다. 어느덧 양궁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는 것보다 난적을 만나 팽팽한 신경전 끝에 우승하는 경합으로 치른다. 투창·원반·해머 같은 육상의 필드 경기도 기록에 도전하기보다는 경쟁자와의 시소게임 위주로 진행된다.
미디어의 영향력 때문이다. 관전 스포츠를 전제로 하는 미디어는 막대한 물량 투입을 획기적으로 보전할 수 있는 천문학적 광고 수입을 원천으로 삼는다. 이런 맥락에서는 절대적 기록보다는 팽팽한 상대적 경쟁이 훨씬 환금성이 높다.
많은 종목에 걸쳐 인간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과학적 분석도 있다. 최근 은 “약물이나 유전자 조작 등을 빌리지 않고서는 신기록 작성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를 스스로 단련해 새 기록에 도달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장대높이뛰기를 10m 이상 할 수 없고, 마라톤을 1시간 안에 완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그 한계에 도전하는 행위는 고결하다. 남자 100m의 경우 미국 블룸버그대학 연구팀은 그 한계를 9.4초라고 했다. 경쟁자들보다 스타트 반응이 느린 자메이카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는 다행히 그 어느 선수보다 빨리 최고속도에 도달하고 그 지속력이 상대적으로 길다. 그는 스타트를 조금만 빨리 끊어도 자신이 세운 세계 신기록 9.58초를 깰 수 있다. 그가 0.1초라도 기록을 단축한다면 그것은 상호 경쟁을 자극하는 미디어의 유혹을 뿌리치고 절대적 한계치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한 비범한 행위가 될 것이다.
유희
만약 당신 자녀가 <해리 포터> 시리즈 광팬이라면, 아니 1997년에 1권이 발표되고 2007년에 시리즈 전체가 완간되었으니 당신이 10대 시절을 <해리 포터>와 더불어 지낸 첫 세대로 20대 중반에 이르렀다면, 퀴디치를 올림픽에서 볼 수 없을까, 기대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는 없지만, 그것을 다리 사이에 끼고 골을 넣으러 뛰어다니는 종목은 멀지 않아 정식 종목으로 만날지 모른다. 국제퀴디치협회(IQA)는 이 경기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을 추진하고 있다. 폴댄스(봉체조) 마니아들도 음지에서 양지로 도약할 꿈을 꾸고 있다. 나이트클럽의 스트립쇼가 아니라 올림픽 종목이 되는 길 말이다. 이러다가는 ‘런닝맨’도 흥미로운 단체 경기가 될지 모를 일이다.
올림픽 종목 중에는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해볼 엄두를 낼 수 없는 종목들이 있다. 양궁이나 사격은 전문 선수들의 몫이다. 요트와 카누도 일상에서는 아직 이색 레저다. 펜싱이나 승마는 그 자체로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데, 이런 종목이 결합된 근대5종 경기가 있다. 그보다 종목이 적은 트라이애슬론은 산과 평지, 바다를 이용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포환이나 창을 던질 일도 없고, 남에게 ‘빠테르’를 걸거나 총을 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엄격히 말해 올림픽은 인간이 일상에서 거의 하지 않는 행위만 엄선한 대회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근대 문화의 ‘관객화’ 과정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제의와 놀이 안에 내장되어 있던 스포츠가 근대에 이르러 직업선수들의 전문 행위로 분리되었고, 이로써 프로와 아마추어가 분리되었으며 나아가 행위자와 관객까지 분리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엄선된 특수 능력자들의 행위를 통해 극단의 유희를 맛보게 된다. 그것은 고대 희랍 연극이나 중세 카니발의 연희와 흡사한 것으로서, 오늘날 장르적 맥통을 잇는 연극이나 영화가 모조리 ‘어둠의 밀실’에 갇힌 데 비해 유일하게 스포츠만 광장에 남아 있다. 실내 경기라 해도 광장의 격정은 살아 있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런던 수영 경기장은 이 밤의 제전과 물의 유희의 결정판이다.
육체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육체에 대한 절대적 찬미는 위험하다. 독일 영화제작자 레니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강력한 힘에 대한 동경과 선수들의 육체에 대한 찬미가 어떻게 정신적으로 파시즘적 쌍생아인지를 오래전에 입증했다. <의지의 승리>는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담았다. 화면 속에서 히틀러는 모든 힘의 중심에 서 있고, 그 힘은 장엄한 음악과 도열한 군인들의 열병식으로 확산된다. 그 확산된 힘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담은 <올림피아> 2부작, 곧 <민족의 제전>과 <미의 제전>으로 흘러넘친다. 리펜슈탈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선수들의 육체를 찬미했다.
전후 영국 문단의 ‘앵그리 영맨’ 그룹을 대표하는 소설가 앨런 실리토는 오래전 <장거리 주자의 고독>을 썼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콜린 스미스는 성인이 되기 전에 인생의 종막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교도관이 너무나 빨리 달리는 그를 후원했다. 그래서 그는 달렸다. 장차 영국의 주류 사회까지 그를 성원하게 된다. 그런데 본부석의 귀인들이 박수 갈채를 보내는 경기장으로 들어선 그가 갑자기 멈춰버린다. 그는 세상의 모든 선의를 부정하고 비웃고 거절한다. 주인공은 거만하고 권위적인,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경기장 본부석까지 독차지해버린 자들을 위한 승리의 꼭두각시 놀음을 거절했다. 그만의 냉소적인 방식, 곧 멈춰서는 것으로 그는 승리했다.
이번 대회에서 이런 선수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수들이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달릴 것이다. 다만 그것을 그 무슨 ‘국가주의’니 ‘순수한 열정’이니 ‘평화의 한마당’이니 하는 말로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고심 끝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처음으로 여성 선수를 출전시키기로 했다. 이로써 모든 국가에서 여성 선수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녀가 어떤 복장으로 경기장에 들어설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이색 유니폼’으로 소개되어서는 안 된다. 출전 그 자체가 올림픽 역사의 기록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 역사적 의미가 곳곳의 경기장에서 펼쳐질 것이다.
초월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 때 육상 100m 결승선의 토머스 버크는 땅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엉덩이만 추켜세운 채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당연하다고? 지금이야 그렇지만 그때는 모두 서서 스타트를 했다. 버크는 금메달을 땄고, 그의 독특한 자세 ‘크라우칭 스타트’(Crouching Start, 웅크린 채 출발함)는 100년이 넘는 전통이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수영의 배영 종목에서 17살에 금메달을 딴 아돌프 키에프는 ‘플립 턴’(Flip Turn)을 최초로 구사했다. 모두가 손으로 벽을 짚은 뒤 턴을 할 때, 그는 턴 지점을 1m쯤 남겨놓고 몸을 뒤집어 발로 터치했다. 턴하는 시간도 줄어들었고, 발로 콘크리트벽을 힘껏 차버림으로써 그 반발력으로 속도를 높였다. 지금은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고결한 상상력의 백미는 미국 높이뛰기 선수인 딕 포스베리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그는 최초로 2m 장벽을 넘어 2.24m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다. 모두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가슴을 안으로 접거나 웅덩이를 건너뛰듯이 두 발을 교차하며 넘었지만, 포스베리는 직진하는 힘을 수직으로 앙양시키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등으로 바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뤼시앵 골드만은, 한 발은 비루한 현실에 처박혀 있지만 다른 한 발은 저 너머의 다른 세상으로 초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했다. 스포츠가 바로 그런 세계다. 우리가 스포츠에 몰입하는 까닭은 초월성 때문이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현상이 있다. 중추신경계 화학적 전달물질인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Opioid Peptide)가 그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베타 엔돌핀, 베타 리포트로핀, 다이노르핀 등이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줄이겠다. 내가 강조하는 초월성이란 이 물질대사에 의한 혈장 엔돌핀 증가가 아니다.
스포츠는 규칙이다. 규칙은 선수를 제약한다. 사격 규칙은 엄격하다. 공기 소총 규칙 중 멜빵에 관한 조항을 보면 “멜빵은 폭이 최대 40mm까지 허용되며, 왼팔 윗부위에만 멜 수 있고, 소총 전단의 한 지점에만 부착할 수 있으며, 손이나 손목의 한쪽만을 따라서 지나가야 하고, 멜빵 고리와 손멈치를 제외하고는 멜빵이나 멜빵 부착물의 어떠한 부위도 소총에 닿으면 안된다”라고 되어 있다. 나는 아직 방아쇠나 총열에 대해서는 쓰지도 않았다. 레슬링의 경우 부당한 공격 사례가 30가지를 넘는다. 그 모든 규칙을 지키며 상대를 공격한다.
이런 규칙은 선수를 제약한다. 그러나 동시에 규칙은 경기가 난장판이 되는 것을 막아주며, 선수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것을 돕는다. 규칙이 없다면 경기는 이뤄지지 않는다. 이 모순 속에서 선수들은 초월한다. 규칙 안에서 규칙을 초월한다. 우리도 규칙과 금기와 제약을 넘어 초월하고 싶어 한다. 일상에서 그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서 밤잠을 지샌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1924년, 기차 여행 중이던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은 육중한 기차와 쭉 뻗은 레일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성급한 교합처럼 울려대는 불규칙한 소리에 영감을 얻었다. 쿵쾅대는 마찰음은 그에게 <랩소디 인 블루>를 선물했다. 스포츠 또한 그런 우연과 즉흥으로 이뤄진다. 만약 스포츠에 우연이 없고, 따라서 강자는 반드시 승리하도록 되어 있어서 즉흥의 변주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면, 스포츠 뉴스만 봐도 족하다. 스포츠가 결과보다는 과정의 미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격투기 종목이 우리에게 주는 쾌감은 그 링이나 매트에서 누군가가 한 대 얻어맞고 일어나지 못하는 극단적 공격성 때문이 아니다. 과정의 드라이브에 동반해 선수들의 땀방울을 함께 느끼며 고도로 감정이입이 된 순간, 엎어치기 한판승이나 어퍼컷 다운이나 태권도의 돌려차기가 작렬한다. 그 순간만 편집한 하이라이트는 우격다짐의 몸싸움이지만, 거의 맨몸으로 서로를 의지하면서 동시에 밀어내야 하는 선수들의 과정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우연성과 그것을 자기 스타일로 드리블해나가는 즉흥 변주곡을 만나게 된다. 태권도, 유도, 복싱, 레슬링이 이번 대회의 격투기 종목이다. 팀 플레이가 아니라 개인 종목이며, 그것도 숨가쁘게 다양한 동작이 교차한다. 상대의 움직임과 자기 움직임 사이의 우연적 요소를 기민하게 포착해 그 순간에 즉흥 변주를 온몸으로 연주해야 한다.
자메이카의 육상 선수 우사인 볼트. 한겨레 자료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2008년 베이징 금메달. 이번 올림픽에선 장미란의 메달 색깔보다 그녀의 도전이 더 의미 있다. 광저우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