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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 박물관에서 해방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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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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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노교수의 유고… 역사는 표면적인 사실의 밑바닥을 탐구하는 것

(사진/역사를 위한 변명 마르크 블로크 지음·고봉만 옮김 한길사(02-547-5723∼4) 펴냄, 8천원)
비시정부 친독 의용대의 감시와 처벌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44년 6월, 독일에 저항하다 체포된 26명의 프랑스인이 리옹시 근처의 벌판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 중 하나였던 16살의 소년이 몹시 떨며 옆에 있던 늙은 군인에게 물었다.“아프겠죠?” “그렇지 않단다, 얘야.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는 따뜻한 손길로 소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만세!”라고 외치면서 쓰러졌다.

늙은 군인은 20세기 역사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였다. 2차대전 발발 당시 이미 여섯 자녀를 두었던 53살의 블로크는 스스로 농담했듯이 ‘프랑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대위’로 전쟁에 지원했다. 프랑스가 패배하고 비시정권의 유대인 배척법에 따라 교단에서 쫓겨난 이 노교수는 ‘나르본’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갔다.

마르크 블로크는 지배자의 역사를 민중의 역사로 끌어내린 ‘아날학파’의 제1세대 학자였다. 블로크가 뤼시안 페브르와 함께 1929년 창간한 ‘사회경제사 연보’를 중심으로 형성된 아날학파는 정치보다는 사회, 개인보다는 집단, 연대보다는 구조를 역사 인식의 기본 골격으로 삼아 사건 중심, 인물 중심에서 장기 지속과 집단 심성을 역사학의 연구 영역으로 끌어들다는 평가를 받는다.

40년 프랑스의 패퇴 뒤 귀국해 43년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기 직전까지 틈틈이 집필한 이 책은 블로크의 마지막 역사 저술이자 미완성의 유고집이다. 직접 타이프를 친 부분마저 인쇄되기 전 지은이의 손을 떠난 이 미완성 원고는 평생의 동료였던 페브르의 손질을 통해 1949년 세상에 나왔다.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책 들머리를 장식하는 아들의 순진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블로크는 <역사를 위한 변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던 날, 참담한 패배 앞에서 “역사가 우리를 배반했다고 생각해야 할까?”라고 말한 동지의 중얼거림은 아이의 질문과 하나가 되어 노역사가에게 박물관의 지하창고에 갖혀 있던 역사학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화두가 됐다.


블로크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역사학을 대하던 지식인들의 냉소적인 시선에 반박하면서 “역사의 대상은 인간이다”라는 기치 아래 인간학으로서의 역사학을 강조했다. 그는 역사를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 속의 인간들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한다. 또한 블로크는 역사학을 “시계 제조업도 고급가구 세공업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움직이는 그 무엇”으로 평가하면서 “표면적인 사실들의 밑바닥을 뚫고 들어가려는 지식”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오래 전부터 집착해온 “기원이라는 우상”과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인위적인 구분을 비판한다. 그는 역사가들이 죽은 이의 주머니를 뒤져 유물을 찾아 전시관에 보관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역사적 감수성”을 가지고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된 5장 ‘역사의 개념-원인의 설명’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의 원인은 가정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은 국내에서 이미 79년과 82년, 두종의 번역서가 나왔다. 이번에 새롭게 번역된 이 책은 페브르가 49년 펴냈던 원본을 블로크의 아들 에티엔 블로크가 93년 재검토, 수정해 새로 출판한 두 번째 판(비평판)으로 이 전의 두 번역서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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