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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죽음 향한 여정 같은 음악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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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10 18:14 수정 : 2012-07-1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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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 순례서경식 지음·한승동 옮김·창비 펴냄·1만5천원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의 책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서 교수는 처음엔 말러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50살이 넘어서까지 말러가 왜 좋은지 몰랐다고 고백할 정도다. 뭐든지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자세를 버리라며 말러를 즐기는 법을 충고하는 부인과 깊은 골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랬던 서 교수는 왜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말러 부부의 묘까지 찾아가게 된 걸까.

서양미술 순례는 ‘절망’, 음악 순례는 ‘자기분열’

이 책은 기존의 느긋한 서양음악 순례기와는 다르다. 오히려 겨울철 눈보라치는 들판을 주린 배로 걸어온 방랑자의 처절한 독백에 가깝다. 음악은 이 독백의 소재에 불과해 보일 정도다. 그 독백이 너무 차가워 때론 불편함마저 느껴진다. 서 교수도 책 맺는말에서 이 책은 음악순례라기보다 죽음을 향한 여행일 것이라고 말한다.

서 교수의 인생은 삶보다 죽음에 익숙했다. 그는 1971년 박정희 정권의 간첩조작 사건으로 수감된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1980년대 초반 아버지·어머니는 형들의 석방을 못 보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형들이 한국 감옥에서 죽을 것이며 유골을 수습해야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스스로 각인시켰다. 그때 그는 30대였고 거기다 작가를 지망하는 백수였다. 그가 이 절망적인 상황을 서양미술에 담아 풀어간 책이 1991년 펴낸 <나의 서양미술 순례>였다.

30년 전 서양미술 순례의 열쇳말이 ‘절망’이었다면 30년 뒤 서양음악 순례의 열쇳말은 ‘자기분열’과 ‘죽음’이다.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사회의 편견뿐 아니라 모국인 한국의 독재정권과 싸워온 그의 삶이 녹아 있다. 말러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말러는 유대인이지만 청년 시절 독일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범게르만주의운동에 빠졌고, 궁정가극장 음악감독을 하려고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이런 경험 때문에 합리성을 강조하는 근대 계몽주의의 허구를 꿰뚫어보는 염세적인 교향곡을 작곡했다.

자신의 형들과 똑같이 간첩 혐의로 영어(監獄)의 삶을 겪은 윤이상의 음악 또한 서 교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독재의 감옥에서 오페라를 작곡한 거장의 삶 때문만은 아니다. 1981년 윤이상과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 <상처 입은 용>의 일본어판 출판기념회에서 그를 처음 본 서 교수는 윤이상의 작품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구해 듣는다. 국악기 피리 소리를 난생처음 들은 그는 “이미 거의 잃어버리고만 내 음악적 모어(母語)의 본거지를 찾아갔다”고 당시의 충격을 회고한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음악으로 이뤄진 압도적인 고뇌의 화두를 윤이상을 통해 마주했던 것이다.


책에 생기를 불어넣는 여자 ‘에프’

하지만 이 책은 21년 전 나온 전작 <나의 서양미술 순례>처럼 절망으로만 직조돼 있지 않다. 성악가 출신의 일본인 부인 덕분이다. 서 교수는 미술 순례는 혼자서 떠났지만 서양음악 순례는 부인과 함께 떠났다. 책에서 ‘에프’로 명명되는 부인은 자신이 참여한 동네 아마추어 합주단 공연의 관객이던 서 교수와 가까와져 결혼했다. 부인은 그의 인생뿐 아니라 책에 생기를 넣어준다. 한없이 깊은 절망의 세계로 침잠하려는 서 교수 특유의 사유에 부인은 그때그때 제동을 걸며 그를 빛의 세계로 이끈다. 말러의 묘지를 방문한 뒤 “말러의 특징은 자기분열이야”라고 말하는 서 교수에게 부인이 “당신처럼”이라고 톡 쏘는 대목 등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그에게 음악은 그의 말처럼 “한없는 청순과 고귀함, 그리고 바닥 모를 질투와 욕망을 동시에 지닌 존재”일지 모르겠다.

권은중 기자 한겨레 경제부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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