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제크 방한을 후원한 의류회사 마인드브릿지의 서울 신촌 매장에 지제크의 강연을 알리는 광고판이 놓여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별칭을 가진 그가, 한국의 중소자본 눈에는 그다지 위험스럽지 않은 존재로 인식된 것일까.
박승화 기자
영문학 계열에 집중된 학문적 관심 국내에서 지제크에 대한 관심도를 가늠할 수 있는 참고 지표는 학술 저널에 나타난 지제크 관련 문헌의 출현 빈도다(총 62건, 국회도서관 자료목록 참조). 2001년 5건이던 게재 건수는 지제크가 처음 방한한 2003년 8건으로 늘어난 뒤 2006년 10건, 2008년 11건, 2011년 10건 등으로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조명된 동시대 철학자 가운데 이처럼 꾸준한 등장 빈도를 보여주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지제크보다 4~5년 앞서 주목받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의 경우, 가장 많은 글이 쓰인 2007년에도 6건(전체 22건)에 그쳤다. <제국>과 ‘다중론’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네그리(전체 9건)는 굳이 언급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참고로,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를 100만 부 넘게 팔아치우며 국내에 ‘정의론 열풍’을 불러일으킨 마이클 샌델은 최근 2년 새 6권의 저서가 번역됐지만, 저널에 실린 국내 연구자의 문헌은 2010년 4건, 2011년 8건에 그쳤다.) 눈여겨볼 지점은 지제크와 관련된 국내 문헌의 분과학문별 분포다. 학위 논문(석사) 11건 가운데 8건이 영문학 계열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저널에 실린 62편의 글도 마찬가지여서, 지제크의 이데올로기론과 주체이론, 정신분석학에 관한 이론적 주석이거나, 이를 활용한 비평이론과 실재비평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경우가 90% 이상을 차지한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급진민주주의자로 머물던 지제크가 1990년대 중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하는 레닌주의(공산주의)로 정치적 선회를 감행했음에도, 국내에선 여전히 그를 정신분석학의 좌파적 판본, 미학(비평)의 정치성을 회복하기 위한 이론적 전거쯤으로 소비돼온 것이다. 수년간 대학과 대중 학습모임에서 지제크를 강의해온 한보희(연세대 강사·비교문학)씨는 “현실에 만연한 불안과 고통의 기원을, 사회구조와 개인(주체성)의 내적 구성 원리로부터 동시에 추적해가는 참신하고 정교한 독법이 새로운 비평 방법론의 출현을 기다려온 인문학계의 요구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크다”고 말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헤겔 변증법을 독자적 방식으로 종합한 지제크의 정치철학(미학)이 ‘알튀세르와 들뢰즈 이후’의 비평 프레임을 갈망해온 인문학자(비평가)들에게 새로운 참조 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 배경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가시화하면서 나타난, 문학(문화)비평을 반자본주의(자본주의 너머의 체제)에 대한 현실적 요청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문학 고유의 구원론적 열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IMAGE3%%] ‘관념 좌파의 하위문화’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지제크의 급진주의를 바라보는 사회과학자들의 시선은 냉담하다. ‘관념 좌파의 하위문화(sub-culture)’쯤으로 폄하하려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반자본주의(나아가 공산주의)라는 급진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지제크의 정치 담론은 사변적인 철학 언어의 세계에 완강히 갇혀 있다고 보는 탓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추상적인 언어 세계, 상징과 이미지로 재현된 세계 안에서 아무리 전복하고 혁명한다 해도 이건희도, 이명박도, 박근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화하는 건 현실적 지배관계의 중심 고리를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공략할 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관념 속에서 세계를 뒤집어 엎긴 쉬워도,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에서 세상을 1cm라도 옮겨놓기란 무망한 일”이라고 신 교수는 말한다. 물론 지제크를 수용하는 쪽 생각은 다르다. 반자본주의 비전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일은 철학의 영역과 철학자의 임무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지제크 역시 자신에게 ‘현실의 모순과 적대를 해결할 정치적 실천 강령이 무엇이냐’ 묻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문자 타자’(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존재)를 상정하는 일이기에,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는 부당한 요구라고 일축한다. 이런 지제크의 태도를 두고 한보희씨는 덧붙인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정치적 초인이나 영웅은 없으며, 그들(초인·영웅)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이들 자신이야말로 변혁을 추동할 정치 행위의 주체라는 뜻이다.” 이같은 변론에도 불구하고, 정치 프로그램의 부재가 지제크의 담론에 내장된 근본적 난점에서 기원한다는 비판은 좀체 잦아들지 않는다.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철학)는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카르센티의 용어를 빌려 지제크식 급진주의를 ‘바깥의 정치’라 이름 붙인다. “나름의 방식으로 해방의 정치를 추구하지만, 그 가능성을 제도적인 정치의 외부에서 찾는다”는 이유에서다. 바깥의 정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상(인민의 지배)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서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 지점에 근거해 체제 극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정치다. 문제는 바깥의 정치에는 역사에 대한 경험적 분석이 없다는 점이다. 진 교수는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겠다고 하지만, 지제크에겐 마르크스가 수행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정밀한 해부나 국가와 통치 유형에 대한 분석이 없다.” 지제크가 ‘역사적 분석’을 ‘역사철학적 비평’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드레스 코드’에 불과한가 진 교수의 비판은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최근호에 지제크의 최근작 두 편에 대해 평한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의 진단과도 흐름을 같이한다. 그레이는 지제크의 공산주의 비전을 “지배적 자본주의 질서가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알지만, 실질적 대안을 개념화할 수 없는 상태에서 등장한 형체 없는 급진주의”라고 꼬집는다. 그레이에 따르면, 지제크의 정치적 급진주의는 현 단계 자본주의 문화의 수혜를 입은 “미디어 장치와 명사(celebrity) 추종 문화의 산물”에 불과한데, 그것은 지제크가 구사하는 인용과 수사의 대부분이 후기 자본주의의 스펙터클 문화(영화, 문학작품, 대중소비문화)에 과잉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들의 비판이 정당하다면, 지제크의 방한 과정에서 빚어진 논란에 대해서도 하나의 ‘징후적 독해’가 가능해 보인다. 지제크의 방한 비용 대부분을 마인드브릿지라는 중소 의류회사가 부담했다는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별칭을 가진 그가 실상은 반주변부의 중소자본 눈에도 그다지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는, 정치적으로 무해한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빙하는 사례가 아니냐는 거다. 20세기 자본주의의 끔찍한 악몽이었던 레닌과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교양인의 관용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과시하는 ‘품격의 드레스코드’ 정도로 소비되고 있다면, 이 상황은 자못 비극적이다 못해 희극적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