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보복은 안 돼~
사라진 정의봉
등록 : 2012-06-18 20:26 수정 : 2012-08-04 18:47
검찰에 출입할 때 일이다. 검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초한지>의 ‘소하’ 얘기가 나왔다. 중학생 때 정비석의 <초한지>를 읽은 게 끝이었다. 장량·한신·범증, <초한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이나 장면, 고사 등은 그동안 주워들은 게 있어 대충 알겠는데 ‘소하’는 어찌된 일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무식해. 어떻게 그걸 몰라?” 검사가 면박을 줬다. “기억이 안 난다니까.” “왜 기억이 안 나? 무식하니까 그렇지.” “아, 진짜. 무식한 거 한번 보여줘?”
나중에 회사 후배에게 ‘검사한테 무식하다는 소리 들었다’고 했더니, “형, 진짜 무식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젠장. ‘깊이 없는 박람강기’ ‘쓸모없는 잡학다식’을 자랑하며 살아왔건만. 복수를 해야 했다. 다시 그 검사 방에 갔다.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현암사에서 펴낸 <장자>가 놓여 있었다. 나도 저 책은 읽었다. 그런데 기억은, 별로 없다. 검사들은 스스로를 ‘칼잡이’라고 부른다. <장자>에 나오는 ‘포정해우’, 포정의 칼 얘기를 한참 했다. 여기서 더 밀리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아는 척을 했다. 이번에도 각을 뜨는 데 실패했다. 복수를 하려면 와신상담의 인내가 필요했다. 쓸개도 핥고 똥도 찍어먹어야 하나. 그리고, 때는 왔다.
그 검사의 아들이 수학능력시험을 쳤다고 했다. 성적이 신통치 않은 모양이었다. “재수를 해봐서 아는데, 그거 할 만해요.” 검사가 버럭 했다. “아직 지원도 안 했는데 재수 없게 왜 재수 얘기야.” 이걸로는 부족하다. 얼마 뒤, 내가 나온 학교에 검사 아들이 지원했는데 떨어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입속에 칼을 품고 검사 방 문을 열었다. “무식한 기자도 들어간 대학을 떨어졌네요. 무식한 기자도 들어갔는데. 무식한 기자도 거긴 쉽게 갔는데.” 그날 무식한·무식한·무식한을 무한 반복했다. 사적 보복은 이렇게 무식하게 완성됐다.
근대 사법체계는 사적 보복을 금지한다. 아버지의 원수, 사부님의 원수, 자존심의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도 칼질을 하거나 다리 밑으로 밀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어느 그룹 회장님은 맞고 돌아온 아들의 복수를 위해 사적으로 ‘아구창’을 날렸다가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6년 10월 버스기사 박기서씨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씨를 ‘정의봉’으로 때려 숨지게 했다. 박씨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고 썼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읽고, 민족을 대신해 보복에 나섰다고 했다. 안씨가 죽어, 백범 선생 암살 배후의 진실을 밝힐 기회도 사라졌다.
‘충정봉’도 있다. 박달나무로 만든 진압봉이다. 쓰임새는 흉악했다. 1980년 5월 광주를 덮친 공수부대원들의 손에 충정봉이 들렸다. 작전명도 ‘충정작전’이었다. 시민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다 총질·칼질까지 했다. 이를 지시한 전두환씨가 요즘 설친다. 너무 설친다. 이 양반은 건강한지 궁금했다. 다른 뜻은 없다. 정말로 궁금했다. 포털 사이트에 ‘전두환 거’까지 쳤는데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에 따라 ‘전두환 건강’이 따라나왔다. 건강하단다. 정의봉, 어디 갔냐고 묻는 게 아니다. 사적 보복은 안 된다. 그렇다는 얘기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