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집어드는 순간 당신도 마술에 걸린다”는 모디스트 천순임의 생각
모자전문 디자이너(모디스트) 천순임(37). 그는 햇빛 아래 모든 이들에게 모자 쓰는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인생을 걸었다. 지난해 9월에 시작하여 최근까지 모두 서울시내에만 4개의 가게를 연이어 오픈하고 있다. 그가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모자의 상표는 ‘루이엘’. 프랑스말로 ‘그와 그녀’라는 뜻이다. 모자를 쓴 그대와 나라는 말인 듯싶다.
“옷을 디자인하는 패션디자이너의 존재나 전문 브랜드에 대해서는 모두 익숙하지만 모자에도 그런 개념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세요.” 모자에 무슨 디자이너? 리어카에서 한 5천원 하는 거 사다가 한여름 쓰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바꿔놓겠다는 것이 천 모디스트의 포부이다.
아시아인 처음으로 C.M.T서 공부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모자 전문학교인 C.M.T에서 공부하고 왔다. “제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그 학교를 졸업했어요. 이제는 한국인이 제 후배들까지 합하면 4∼5명 정도 그 학교 출신이 되었지만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불문학 박사학위를 따겠다는 푸른 꿈을 안고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머리에 학위모를 쓰는 대신 모두의 머리에 모자를 씌우는 사람으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 과정이 한편의 소설이다. “디종에서 어학공부를 하던 겨울이었는데 폭설이 내렸어요. 40년 만에요. 눈속에 갇혀 한달 반 동안 기숙사에만 있었지요. 친구들과 재봉틀을 갖고 놀면서 제가 진짜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된 것이죠.” 불문학은 파면 팔수록 깊은 미궁으로만 빠지는 것 같았는데 재봉틀 앞에 앉아 있으니 시간시간 분명한 결과물이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나더라는 것이다.그 희열에 몸을 떨던 그에게 한 일본인 친구가 모자학교를 소개했다. 당시엔 모자학교? 하는 반응을 했지만 참관수업 1시간 만에 “바로 이거다” 싶었다. 모자와의 운명적 해후. 천순임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짐 챙겨 파리로 와서 바로 모자학교에 등록을 했다. 소르본대학 언어학 학사과정에도 동시에 등록했다. 미련의 끈이랄 수도 있었다. 낮에는 불문학도로 저녁에는 모자디자이너로 꿈을 키우며 그는 바게트 빵과 정을 들여갔다. “아무래도 인종차별을 느끼지요. 특히 모자가 서구인의 문화다보니까요. 다행히 저를 가르치신 분이 마리 마르시에의 수석 디자이너였는데 많이 돌봐주셔서 잘 배울 수 있었어요.” 파리 10구 시청에서 졸업작품 쇼를 하고 파리시내의 유명한 모자숍 마리 메르시에서 연수를 했다. 그리고 곧장 한국의 유수 모자업체인 ‘세기모자’로 스카우트되어 서울로 돌아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가 공부를 마칠 때만 해도 국내에 아직 정식으로 모자 공부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운 좋게 금방 일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세기모자’ 사장님에 대해 언급했다. “제가 언젠가 우리나라 모자역사에 대해 책을 쓰게 되면 이분은 꼭 들어가야 되죠. 역경을 딛고 평생을 모자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오신 분이시지요.” 장인정신의 선배를 두었다는 자부심과 자신도 그런 열정으로 모자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비친다. “처음엔 정말 제 열성을 저도 못 말렸어요.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막 달려가서 이 모자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모자는 서민과 동떨어진 사치품인가?
그가 돌아온 93년 당시, 서울거리의 사람들이 모자에 대한 낯가림을 덜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가 기대한 것보다 모자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아주 많았다고 한다. “디자인만 받쳐주면 모자를 계속해서 쓸 수요층이 있겠다 싶었지요.” 그러나 모자는 확실히 양말이나 내복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장갑과도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모자는 서민과 동떨어진 사치품인가? “필수품도 사치품도 아니고,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는 분에게는 중요한 의복”이라는 게 천 실장의 유권해석이다. 돈이 아니라 개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모자는 꿈을 실현하는 매체라는 지적. “모자를 써보는 그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보여요. 일종의 환상 같은 게 아닌가 싶어요. 아름다운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그동안 정말 모자를 써보고 싶었다고 고백하지요.”
사실 모자를 쓰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맞았다는 것이다. 머리에 맞는 모자가 없어서, 또 어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모자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또 많은 이들은 너무나 쑥스러워서 모자를 쓰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모두 마음속으로는 모자를 써보고 싶어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 고객, 특히 여성고객은 “난 모자가 안 어울려요” 하면서도 연신 이 모자 저 모자를 쓰고 거울 속의 얼굴에 홍조를 띤다. “모자를 쓰는 것 자체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의 큰 변혁인 듯 여기지요.”
모자를 쓰고 그 둥근 차양이 마련해주는 공간 안에서 마술에 걸린 듯 황홀한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어느날 아주 얼굴이 크고 몸집도 크신 분이 오셨는데 굳이 챙 넓고 꽃 달린 모자를 잡고 놓을 줄을 모르시는 거예요.” 그것보다는 짙은 색의 단정한 모자가 훨씬 잘 어울린다고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권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고객의 무딘 센스가 안타까웠다. “그런데 어느날,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쓸 권리가 있구나 깨달았죠.”
자기가 쓰고 행복하다면 그 모자야말로 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천 실장은 주장한다. 행복은 모자를 쓰고 온다! 모자를 집어드는 순간, 현실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 마술은 여성들만 걸리는 게 아니다. “남성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자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아이비 캡이나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쓴 피드라 스타일의 중절모, <인디아나 존스>형 스타일이죠. 그런 것들이 아주 인기예요. 꼭 어울려서가 아니라 그런 모자를 쓰고 그런 분위기를 한번 가져보고 싶은 것이지요.”
“자신감이 최대의 코디”
어떠랴, 잉그리드 버그만을 떠나보내는 험프리 보가트처럼, 중절모 앞 챙을 약간 잡아당겨 쓰면서 사랑하는 아내의 등을 떠밀며 “집과 아이는 내가 돌보겠으니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의연한 폼을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좌우지간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두상이 크든 적든 모자를 쓰면 이상하게 모두들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이다.
그도 자신의 모자를 한국에 처음 적용할 때는 디자이너로서 어려움을 겪었다. “너무 튀었지요. 사람들은 독특하고 개성적인 것보다는 일반화된 디자인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편이지요. 요즘은 많이 개성적이 되었지만요. 내 모자는 창고에 쌓여만 가는데 후배 디자이너의 모자는 리피트되어 만개, 이만개 나가는 걸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요. 내 디자인이 더 낫다고 위안해 보았지만 매출이 말해주잖아요.”
모자를 만진 지 한 5년이 지나니 그제야 “모자가 눈에 보이더라”고 고백한다. “어느날 남대문에 갔는데 다른 건 하나도 안 보이고 모자만 보였어요. 그러더니 모자 만지는 게 편안해졌어요. 사실 그전에는 모자를 만지면서도 모자가 어려웠거든요.” 이제 그는 천을 가위로 슥슥 삭삭 자를 때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다. 그리고 모자를 쓰는 기준에 대해서도 더욱 너그러워졌다. “자신감이 최대의 코디”라고 말한다.
최근 아줌마들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는 스타워즈형 플라스틱 모자에 대해 전문가로서 견해를 물어 보았다. “미관상 좀 그렇지요. 무서워 보이지 않으세요?” 그리고 덧붙였다. “요즘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이 모자를 벗지 않는다고 하던데 저라면 벗겠어요.” 불어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불안할 때마다 불어로 된 영화를 본다는 모디스트 천 실장. 모자 따라가는 우리의 여정을 그가 안내한다.

사진/ 모자전문 디자이너 천순임씨.(임종진 기자)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모자 전문학교인 C.M.T에서 공부하고 왔다. “제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그 학교를 졸업했어요. 이제는 한국인이 제 후배들까지 합하면 4∼5명 정도 그 학교 출신이 되었지만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불문학 박사학위를 따겠다는 푸른 꿈을 안고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머리에 학위모를 쓰는 대신 모두의 머리에 모자를 씌우는 사람으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 과정이 한편의 소설이다. “디종에서 어학공부를 하던 겨울이었는데 폭설이 내렸어요. 40년 만에요. 눈속에 갇혀 한달 반 동안 기숙사에만 있었지요. 친구들과 재봉틀을 갖고 놀면서 제가 진짜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된 것이죠.” 불문학은 파면 팔수록 깊은 미궁으로만 빠지는 것 같았는데 재봉틀 앞에 앉아 있으니 시간시간 분명한 결과물이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나더라는 것이다.그 희열에 몸을 떨던 그에게 한 일본인 친구가 모자학교를 소개했다. 당시엔 모자학교? 하는 반응을 했지만 참관수업 1시간 만에 “바로 이거다” 싶었다. 모자와의 운명적 해후. 천순임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짐 챙겨 파리로 와서 바로 모자학교에 등록을 했다. 소르본대학 언어학 학사과정에도 동시에 등록했다. 미련의 끈이랄 수도 있었다. 낮에는 불문학도로 저녁에는 모자디자이너로 꿈을 키우며 그는 바게트 빵과 정을 들여갔다. “아무래도 인종차별을 느끼지요. 특히 모자가 서구인의 문화다보니까요. 다행히 저를 가르치신 분이 마리 마르시에의 수석 디자이너였는데 많이 돌봐주셔서 잘 배울 수 있었어요.” 파리 10구 시청에서 졸업작품 쇼를 하고 파리시내의 유명한 모자숍 마리 메르시에서 연수를 했다. 그리고 곧장 한국의 유수 모자업체인 ‘세기모자’로 스카우트되어 서울로 돌아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가 공부를 마칠 때만 해도 국내에 아직 정식으로 모자 공부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운 좋게 금방 일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세기모자’ 사장님에 대해 언급했다. “제가 언젠가 우리나라 모자역사에 대해 책을 쓰게 되면 이분은 꼭 들어가야 되죠. 역경을 딛고 평생을 모자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오신 분이시지요.” 장인정신의 선배를 두었다는 자부심과 자신도 그런 열정으로 모자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비친다. “처음엔 정말 제 열성을 저도 못 말렸어요.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막 달려가서 이 모자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모자는 서민과 동떨어진 사치품인가?

사진/ 모자를 만진 지 5년 만에 그는 모자가 보였다고 고백한다. 디자인실에서.(임종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