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원 무대에 올린 극단 ‘해’(解)의 새로운 실험, <모퉁이에서 돌아보다>
동그란 생크림 케이크와 콜라를 앞에 놓고 아이들이 모여 앉았다. 얼굴에는 아직 지우지 못한 분장 위로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다. “민혁(가명)이랑 정미 너네 커플이 케이크 잘라봐라.” 연극 연습을 할 때 유난히 친하게 지내던 누나와 함께 칼을 잡은 민혁이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케이크를 자르고 후닥닥 자리로 들어갔다. “먹자”는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케이크 조각을 옆 친구와 누나들 얼굴에 비벼놓고 깔깔거린다. “야 분장이 저절로 지워진다.” “누나 이걸로 화장하니까 더 예쁜데.”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연극
6개월 전 함께 손을 잡자고 해도, 춤을 추자고 해도 쭈뼛거리고 눈을 맞추지 않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소년원 친구들 앞에서 연극 <모퉁이에서 돌아보다>를 공연한 이날 뒤풀이에서 아이들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 올 2월부터 시작한 워크숍 마지막날이기도 했던 이날, 극단 ‘해’(解)의 대표 노지향씨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극단 ‘해’와 경기도 의왕시에 자리한 고봉정보통신중고등학교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3년이 됐다. 이번 3기는 몇몇 학생들이 퇴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6개월로 워크숍을 마무리했지만 1, 2기 학생들은 꼬박 한해 동안 매주 한번씩 ‘해’와 만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연극 공연은 ‘해’가 운영하는 워크숍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이들의 작업은 무대와 객석간의 억압적 관계, 개인과 사회간의 억압적 관계를 끊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우리들에게 연극이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에요. 스스로 연극의 주체가 되어 수많은 억압 속에 갇혀 있는 개인을 변화시키는 데 워크숍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이론은 연극이론가 아우구스토 보알이 확립한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극’. 브라질의 진보적 연극이론가였던 보알의 이 이론은 관객을 무대의 전면으로 끌어올려 관객 스스로 연기자이자 연출가가 되면서 자신을 짓누르는 억압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도록 유도하고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한 다양한 기법을 제시한다. ‘해’는 97년 내한한 보알의 워크숍 참가자들이 주축이 돼서 만든 단체다. 97년 창단 직후부터 ‘해’는 토론연극, 보이지 않는 연극, 욕망의 무지개 등 보알이 제창한 다양한 연극적 메소드를 적용하는 워크숍을 열어왔다. “스스로를 가두는 여러 장벽들을 부수는 게 이 연극의 출발점이에요. 워크숍은 나 자신을 가두는 장벽과 다른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데 중점을 두죠.” 워크숍에서 이들이 처음 하는 것은 이론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스스로를 해방시키라”는 설득이 아니라 아이들처럼 함께 뛰어다니며 서로 몸을 부딪칠 수 있는 놀이다. “연극한다고 모여서 ‘얼음-땡’ 같은 아이들 놀이를 하니까 처음에는 다들 당황하죠.” 고봉중고등학교 워크숍을 시작했을 때 가뜩이나 목에 힘들어가 있는 소년원 아이들은 한달 동안 단원들의 몸부림(?)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아이들이 띄엄띄엄 하는 질문은 “여기 왜 왔냐?”, “돈은 어디서 주냐?”, “대학나온 아줌마들이 이런 걸 왜 하냐?“가 전부였다. ‘욕망의 무지개’를 띄운다
그러나 석달, 넉달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들이 약속시간에 10분만 늦어도 토라질 정도로 아이들은 워크숍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바깥 세상에서 주위 사람들의 살가운 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열어보이기가 더 어려웠죠. 한 학생은 잘 놀고 어울리다가도 가족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굳고 입을 다물었으니까요.” 워크숍 현장에서는 말만한 덩치의 아이들이 부리는 어리광에 지치기도 했지만 돌아올 무렵엔 늘 가슴 한구석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노씨는 고백한다.
몸풀기와 마음풀기가 충분히 진행된 뒤 이들이 가장 많이 적용하는 연극 형식은 ‘욕망의 무지개’. 말 그대로 무지개처럼 다양한 욕망을 끄집어내 욕망과 당사자, 욕망과 억압자를 대면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지난해 이곳에서 진행했던 욕망의 무지개의 주인공 태현(가명, 18)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 받은 상처가 있었다. 10살 때 자신을 패는 아버지에게 “집 나가라”라고 대들었던 그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비뚤게 나가기 시작했다. 연극에서 이런 정황을 간단히 재현한 뒤 당시 태현이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욕망들을 끄집어냈다. ‘아버지에게 빌고 싶다’, ‘아버지를 패고 싶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가출하고 싶다’는 그의 흩어진 욕망 각각에 공감하는 객석의 친구들이 나와서 그의 욕망을 재현했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맞닥뜨려 싸우기도 하고, 욕망의 대리자들은 또 아버지와 싸우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이 과정 속에서 태현이와 즉흥적으로 출연한 친구들은 마음속에 뒤엉켜 있던 분노와 증오심, 그리고 죄책감을 응시하게 됐다.
언뜻 들으면 사이코 드라마와 비슷해 보이지만 무대에 선 배우들이 직접 상황을 설정하고, 결론까지 자신의 의사대로 이끌어간다는 면에서 ‘욕망의 무지개’는 사이코 드라마보다 적극적인 방법이다.
8월부터는 탈북자 아이들과 함께
이번에 소년원 무대에 올린 <모퉁이에서 돌아보다>는 ‘해’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이야기와 장면을 설정해서 연극으로 만드는 작업은 기존의 연극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항상 ‘나’로 존재하던 욕망과 좌절을 3인칭으로 바꾼다는 면에서 ‘욕망의 무지개’보다 한발 더 나아간 욕망의 객관화 작업이었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할까 토론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가족이야기는 싫다고 잘라 말했었죠. 주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등 돈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지요. 그런데 왜 돈이 필요할까를 토론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가족이야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죠.” 이번 작품을 연출한 김귀연씨의 말이다. 아이들이 줄거리와 대사를 모두 준비한 이번 연극은 한 모범생과 문제아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들과 놀다가 엄마가 찾는 소리에 하나둘 친구들이 떠나고 혼자 놀이터에 덩그마니 남았던 유년의 기억, 어머니를 패고 자신의 등록금을 빼앗아 집을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우리반 평균이 꼴찌야”라며 아이들 앞에서 사정없이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던 교사에 대한 분노 등 속살 깊이 팬 상처의 흔적들이 조명 앞에서 재현됐다. 아마도 자신들의 지난 시절이었을 듯한 불량학생과 함께 이들의 구타와 갈취로 상처받는 모범생의 좌절을 함께 그리면서 이들의 토론은 자신들뿐 아니라 ‘재수없는 놈’의 고통에 대한 이해로까지 나아갔다. 담임교사에게 등떠밀려 연극 워크숍에 참가했던 1, 2기 학생들이 찾아와 함께 무대도 만들고, 엑스트라로 출연도 해줬다.
“처음에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던 아이들이 이렇게 팔찌도 직접 만들어주고, 색연필로 곱게 그림을 그린 편지지에 편지를 보내와요. 워크숍을 하면서 아이들보다 저희들이 더 크는 것 같아요.” 서민정씨가 실로 짠 팔찌를 내보이며 자랑한다.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 워크숍하다가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었나봐요. 한 친구가 사랑한다는 말은 아주 어렸을 때 듣고 처음 들어봤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나도 아무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고 쓴 한 친구의 편지가 기억납니다.”
이번달부터 ‘해’는 탈북자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다. 여건이 된다면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들과도 함께 워크숍을 하는 게 이들의 욕심이다. “연극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욕심은 없습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서로 보듬으며 그들을 짓누르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힘을 주고 싶어요. 이런 힘은 많은 이들을 같은 굴레로 밀어넣는 억압의 사슬을 끊는 데도 한몫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사진/ 고봉정보통신중고등학교 3기 연극반의 공연 <모퉁이에서 돌아보다>.
극단 ‘해’와 경기도 의왕시에 자리한 고봉정보통신중고등학교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3년이 됐다. 이번 3기는 몇몇 학생들이 퇴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6개월로 워크숍을 마무리했지만 1, 2기 학생들은 꼬박 한해 동안 매주 한번씩 ‘해’와 만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렸다. 그러나 연극 공연은 ‘해’가 운영하는 워크숍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이들의 작업은 무대와 객석간의 억압적 관계, 개인과 사회간의 억압적 관계를 끊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우리들에게 연극이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에요. 스스로 연극의 주체가 되어 수많은 억압 속에 갇혀 있는 개인을 변화시키는 데 워크숍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이론은 연극이론가 아우구스토 보알이 확립한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극’. 브라질의 진보적 연극이론가였던 보알의 이 이론은 관객을 무대의 전면으로 끌어올려 관객 스스로 연기자이자 연출가가 되면서 자신을 짓누르는 억압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도록 유도하고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한 다양한 기법을 제시한다. ‘해’는 97년 내한한 보알의 워크숍 참가자들이 주축이 돼서 만든 단체다. 97년 창단 직후부터 ‘해’는 토론연극, 보이지 않는 연극, 욕망의 무지개 등 보알이 제창한 다양한 연극적 메소드를 적용하는 워크숍을 열어왔다. “스스로를 가두는 여러 장벽들을 부수는 게 이 연극의 출발점이에요. 워크숍은 나 자신을 가두는 장벽과 다른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데 중점을 두죠.” 워크숍에서 이들이 처음 하는 것은 이론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스스로를 해방시키라”는 설득이 아니라 아이들처럼 함께 뛰어다니며 서로 몸을 부딪칠 수 있는 놀이다. “연극한다고 모여서 ‘얼음-땡’ 같은 아이들 놀이를 하니까 처음에는 다들 당황하죠.” 고봉중고등학교 워크숍을 시작했을 때 가뜩이나 목에 힘들어가 있는 소년원 아이들은 한달 동안 단원들의 몸부림(?)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아이들이 띄엄띄엄 하는 질문은 “여기 왜 왔냐?”, “돈은 어디서 주냐?”, “대학나온 아줌마들이 이런 걸 왜 하냐?“가 전부였다. ‘욕망의 무지개’를 띄운다

사진/ 7월 28일 열린 워크숍 졸업작품 공연 뒤풀이. 워크숍 시작할 때는 무표정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사진/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싸해요."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 '해' 단원들은 98년부터 매주 한번씩 소년원 아이들을 만나왔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