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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금아파트는 21세기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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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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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폭력, 광기 사이의 줄타기…피투성이 없는 공포영화 <소름>의 윤종찬 감독

사진/ 윤종찬 감독.(이정용 기자)
영화 <소름>을 소개하는 일간지 영화평들의 들머리는 희한하게도 거의 비슷하다. 악령도, 흡혈귀도, 난자당한 시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름끼친다는 식이다. 영화 <스크림>의 등장인물처럼 공포영화의 공식과 관습을 줄줄이 꿰뚫는 사람들에게 <소름>의 관람은 분명 낯선 체험이다. <소름>을 보면서 관객은 10분마다 “악” 소리가 튀어나오는 공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목덜미를 타고 서서히 내려오는 공포를 경험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의 팔뚝을 덮친 소름은 영화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소름>이 만들어내는 공포는 유전하는 악연의 실타래, 인간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운명의 폭력성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하필 그 호텔에 가서나 하필 그 차를 얻어타서라는 비극의 실마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운명의 손아귀 안에서 이미 우리는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비극을 맞이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존재일 뿐이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아내 잃어

“유학가기 전에 성수대교가 보이는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뚝 끊긴 다리를 봤죠. 죽은 사람들은 왜 하필 그 짧은 시간에 그곳을 건너고 있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각본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운명과 기억, 그리고 상실은 <소름>의 윤종찬(38)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다. 95년부터 98년까지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동안 찍은 연작 단편 <플레이 백>과 <메멘토> <풍경>은 각각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과 그를 죽인 남자, 친부모를 알 수 없는 입양아와 아이를 사고로 잃은 여인,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는 남자를 따라간다. 죽음과 기억을 운명이라는 삶의 불가해성과 연관짓게 된 연유에는 유학가기 직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그의 곁을 떠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운명론자인가”라는 질문에 윤씨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신 “그랬다면 <소름>의 마지막 결론은 바뀌지 않았겠나”라고 반문한다.

<소름>은 그가 미국서 만들었던 40분짜리 <메멘토>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운명의 자력으로 인해 아기 때 자신이 버려졌던 아파트를 찾아오는 남자.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학대받고 자식마저 잃은 한 여인이 맺는 기이한 인연을 보여주는 <메멘토>에서 운명은 그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삶의 비의(秘意)다. 그러나 2001년 한국의 한 허름한 아파트로 배경을 옮긴 <소름>에서 운명은 현존하는 공포로 구체화된다. 70∼80년대를 거쳐 흉칙한 몰골로 살아남은 도시의 영세아파트. 정체를 알 수 없는 옆집 사람, 떠내려오는 소문들, 수시로 명멸을 반복하는 낡은 전등의 공간이 전달하는 공포는 21세기 한국사회가 내뿜는 신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98년 IMF가 터졌을 때 귀국했어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랄까요?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보였어요. 사람들은 단절돼 있었고 서로 공격하거나 냉소할 뿐이었죠.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찔함, 저에게 소름 돋는 공포는 그런 거였습니다.” <소름>에서 처음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 장면은 용현이 한밤중에 손님을 태우고 택시운전을 하는 터널 안이다. 음식배달 오토바이가 차 앞에서 희롱하며 운전을 방해하자 손님은 “밟아버려. 내가 책임질게. 저런 새끼는 뒈져야 해” 흥분한다. 터널을 빠져나오니 오토바이는 다른 차와 충돌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장면을 보고 잠시 황당해하던 손님 “잘 죽어부렀네” 쾌재를 부르고 용현과 함께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어젖힌다. 유쾌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시원한 이들의 웃음소리는 섬뜩하다. 이처럼 농담과 폭력, 광기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윤종찬 감독이 진단하는 ‘서울, 2000년 겨울’이다.

<소름>의 모티브는 ‘무식함’

윤감독은 <소름>의 모티브를 “무식함”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의 죽음 앞에서 거리낌없이 낄낄거리고, 자신의 첫 번째 살인경험을 무표정하게 늘어놓는 용현의 무식함, 그리고 잔인성과 순박함을 동요없이 넘나드는 용현의 이중성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결국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만 <소름>에서 선영의 캐릭터는 용현의 다중성격 못지않게 흥미롭다. 사고로 죽은, 또는 죽인 아이를 가슴에 묻고 매일 남편에게 구타당하고 사는 선영에게는 이상한 생기가 있다. 선영은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옆집 친구와 농담을 하면서 낄낄대기도 하고, 용현으로부터 살기를 느낀 뒤에도 끝까지 응대한다. “맞고 사는 여자는 늘 평면적인 이미지로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잖아요. 그런 선입견으로 재단되지 않은 여성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선영은 가진 것 없고, 구타 속에 사는 여성이지만 자기 삶에 대한 집착이 있는 인물이에요. 저는 선영이야말로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종찬 감독은 <소름>의 촬영에 실사조명을 택했다. “어두운 이야기는 어둡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인공적인 빛으로 화면을 조작하지 않는 실사조명은 영화에서 잘 쓰이지 않을뿐더러 보통의 조명설치보다 작업이 훨씬 까다롭다. 실사조명 아래서 영화 속 미금아파트 복도는 미궁처럼 음침하다. 명암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의 얼굴은 선과 윤곽이 또렷이 드러나는 인공조명 속 얼굴보다 기괴하게 다가온다. 실사조명 속 화면은 포장하지 않은 현실이 꾸며낸 가상보다 더 공포스럽다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양식적 메타포인 셈이다.

“다음엔 덜 우울한 영화 찍고 싶다”

영화의 결말, 두 주인공을 묶었던 악연의 고리가 수면 위에 드러난 뒤에도 궁금증은 남는다. 아파트 속 어딘가 숨어 있을 거라던 용현 어머니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에 용현이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감독은 이 질문들에 대해 열려 있는 채로 영화를 닫는다. “<소름>이 그다지 친절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식적으로 나갔다면 피투성이 선영이 용현의 앞에 나타난 장면과 시체를 묻는 장면 사이에 죽어 있는 남편의 모습이 한번 들어가야겠지요.” 시원하지는 않지만 두고두고 떠오르는 장면의 잔상들은 <소름>을 잊혀지지 않는 영화로 관객의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2년 넘게 <소름>을 끌어앉고 있으면서 배우들 못지않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는 윤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는 좀 덜 우울한 영화를 찍고 싶다며 “멜로가 될 것 같다”고 슬쩍 흘린다. 그러나 어떤 장르의 영화를 하더라도 그의 관심사는 “드러나는 현실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 사이의 균열과 그 균열을 야기시키는 거대한 세계”이다. 영화에서 소설가가 독백하듯 그 세계는 “어제의 살인현장에 오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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