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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작은 TV의 반란

소형 TV 판매량 급증 뒤에 숨은 비밀… 1인 가구 급증해 공간 적게 차지하고 활용도 높은 ‘작은 것’들의 경제 급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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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24 15:32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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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한창 발광다이오드(LED)와 3D TV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던 때, LG전자는 뜻밖의 한 수를 뒀다. 당시 유행하던 빈티지 트렌드를 반영한 소형 TV를 출시한 것이다. 14인치 크기에 아날로그 다이얼 방식을 채택한 이 TV는 액정표시장치(LCD) 대신 브라운관 스타일의 평면 CRT를 채택했다(물론 디지털 방송 수신은 가능했다). 그런데 변변한 마케팅도 없이 소품처럼 내놨던 이 TV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제품은 완전히 매진됐고, 급기야 최근 LG전자는 이 레트로 스타일의 TV를 재발매하기에 이르렀다. 32인치 TV도 작아서 못 보겠다는 요즘 세상에서 14인치 TV가 큰 인기를 모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23~27인치 크기의 소형 TV 판매량이 전년 대비 10% 이상 늘었다. 대체 왜?

인구구조가 바꿔놓은 가전시장

삼성전자 HDTV 모니터 TA950
최근 한국은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기존 고령인구의 사망률과 반비례해 출산율과 혼인율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이는 곧 3~4인 단위의 가족이 아닌, 1인 가구 위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 동네 마트에서 소량 포장된 반찬거리를 팔거나 편의점 도시락 판매가 급증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1인 가구들은 보통 작은 집에 산다. 작게는 5~6평, 커봐야 15평 안팎의 집들이다. 실제 최근 조사에서 중·대형으로 분류되는 전용면적 85㎡ 이상의 주택 공급 비중은 20% 아래로 떨어졌고, 반면 60㎡ 이하의 비중은 40%로 높아졌다.

TV는 가전제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다. 부피는 작지만 벽면의 상당 부분을 TV에 내줘야 한다. 이런 작은 집에는 대형 TV를 놓을 공간이 없다. 아니, 놓을 수는 있겠지만 흉물스럽다. 소형 TV뿐만 아니다. 최근 가전제품 매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작은 냉장고의 등장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신형 냉장고는 거의 양문형의 거대한 크기를 가진 것뿐이었다. 작은 냉장고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구형들뿐이었지만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1~2인용으로 쓰일 법한 작고 예쁜 냉장고가 많이 출시됐다. 2~3인용 전기밥솥은 1년 전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체 전기밥솥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결국 인구구조가 가전제품 시장의 판도까지 바꾸고 있는 것이다.

LG전자 시네마 3D TV MX278D
유년 시절, 아버지가 소니의 29인치 TV를 처음 사오셨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니, TV라는 것이 이렇게 클 수가 있나? 혹은 이렇게 커도 되나? 우리 가족은 그 거대한 TV 앞에 밥상을 놓고,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봤다. 그 안에서 가족의 대화가 오갔다. 그러니까 TV는 일종의 공용 가전이자, 가족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정서적 가전이었다. 하지만 젊은 1인 가구들에게는 좀 다르다. 스마트폰과 다운로드에 익숙한 그들에게 TV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큰 불편은 없는 무엇’이다. PC 한 대만 있어도 충분히 방송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데 굳이 크고 비싼 TV를 사서 매달 케이블 시청료까지 꼬박꼬박 갖다 바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간에 대한 이해도 함께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실용성만으로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 예컨대 최근 대기업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건 데스크톱 PC가 아니라 일체형 PC 시장이다. 아이맥 같은 일체형 PC는 구조상 소음이나 발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업그레이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체형 PC 시장이 급성장을 거듭하는 이유는 그 깔끔함에 있다. 미역처럼 덕지덕지 붙은 복잡한 선 대신 플러그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PC를 이용할 수 있다. 작은 집의 벽면에 붙어 있는 거대한 TV는 보기 싫을 뿐 아니라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해친다.


LG전자 14인치 클래식 TV 14SR1EB
TV 튜너를 내장한 23인치 이상의 모니터 시장이 급격히 성장한 건 이런 1인 가구 소비자가 몰렸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결국 소형 TV들이 잠식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대형 모니터 시장이다. 이 20인치대의 소형 TV들은 고화질 영상 입출력(HDMI) 기능을 내장해 PC 모니터 대신 쓸 수 있다. 게다가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의 등장으로 굳이 책상에 앉지 않아도 간단한 업무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실제 가격도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까 소형 TV와 대형 모니터는 사실상 같은 시장 안에 있는 셈이지만, 같은 값이면 ‘TV 시청이 가능한 모니터’보다는 ‘모니터로도 쓸 수 있는 TV’로 수요가 몰린 것이다.

큰 TV의 꿈은 유효하다

올해는 런던올림픽이 열린다. 가전업체들도 올림픽을 대비해 수많은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TV가 있다. 물론 핵심은 초대형 3D TV다. 모든 전자제품은 크기가 클수록 이윤이 많이 남으니까. 그리고 올림픽 마케팅 소외지역에 이 소형 TV들이 있다. 특별한 마케팅 없이도 1인 가구를 겨냥한 이 제품들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다. 대형 TV를 살 돈이 없으니까, 혹은 큰 집을 가질 수 없으니까. 큰 TV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작은 TV를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소형 TV로 올림픽을 시청하며 환호와 탄성을 동시에 내지를 것이다. 왜 이렇게 소형 TV가 잘 팔릴 수밖에 없는지 다음 정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정부는 말해봐야 모를 테니까.

이기원 정보기술(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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