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한창 발광다이오드(LED)와 3D TV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던 때, LG전자는 뜻밖의 한 수를 뒀다. 당시 유행하던 빈티지 트렌드를 반영한 소형 TV를 출시한 것이다. 14인치 크기에 아날로그 다이얼 방식을 채택한 이 TV는 액정표시장치(LCD) 대신 브라운관 스타일의 평면 CRT를 채택했다(물론 디지털 방송 수신은 가능했다). 그런데 변변한 마케팅도 없이 소품처럼 내놨던 이 TV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제품은 완전히 매진됐고, 급기야 최근 LG전자는 이 레트로 스타일의 TV를 재발매하기에 이르렀다. 32인치 TV도 작아서 못 보겠다는 요즘 세상에서 14인치 TV가 큰 인기를 모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23~27인치 크기의 소형 TV 판매량이 전년 대비 10% 이상 늘었다. 대체 왜?
인구구조가 바꿔놓은 가전시장
최근 한국은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기존 고령인구의 사망률과 반비례해 출산율과 혼인율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이는 곧 3~4인 단위의 가족이 아닌, 1인 가구 위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 동네 마트에서 소량 포장된 반찬거리를 팔거나 편의점 도시락 판매가 급증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1인 가구들은 보통 작은 집에 산다. 작게는 5~6평, 커봐야 15평 안팎의 집들이다. 실제 최근 조사에서 중·대형으로 분류되는 전용면적 85㎡ 이상의 주택 공급 비중은 20% 아래로 떨어졌고, 반면 60㎡ 이하의 비중은 40%로 높아졌다.
TV는 가전제품 중에서도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다. 부피는 작지만 벽면의 상당 부분을 TV에 내줘야 한다. 이런 작은 집에는 대형 TV를 놓을 공간이 없다. 아니, 놓을 수는 있겠지만 흉물스럽다. 소형 TV뿐만 아니다. 최근 가전제품 매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작은 냉장고의 등장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신형 냉장고는 거의 양문형의 거대한 크기를 가진 것뿐이었다. 작은 냉장고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구형들뿐이었지만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1~2인용으로 쓰일 법한 작고 예쁜 냉장고가 많이 출시됐다. 2~3인용 전기밥솥은 1년 전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체 전기밥솥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결국 인구구조가 가전제품 시장의 판도까지 바꾸고 있는 것이다.
유년 시절, 아버지가 소니의 29인치 TV를 처음 사오셨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니, TV라는 것이 이렇게 클 수가 있나? 혹은 이렇게 커도 되나? 우리 가족은 그 거대한 TV 앞에 밥상을 놓고,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봤다. 그 안에서 가족의 대화가 오갔다. 그러니까 TV는 일종의 공용 가전이자, 가족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정서적 가전이었다. 하지만 젊은 1인 가구들에게는 좀 다르다. 스마트폰과 다운로드에 익숙한 그들에게 TV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큰 불편은 없는 무엇’이다. PC 한 대만 있어도 충분히 방송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데 굳이 크고 비싼 TV를 사서 매달 케이블 시청료까지 꼬박꼬박 갖다 바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간에 대한 이해도 함께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실용성만으로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 예컨대 최근 대기업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건 데스크톱 PC가 아니라 일체형 PC 시장이다. 아이맥 같은 일체형 PC는 구조상 소음이나 발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업그레이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체형 PC 시장이 급성장을 거듭하는 이유는 그 깔끔함에 있다. 미역처럼 덕지덕지 붙은 복잡한 선 대신 플러그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PC를 이용할 수 있다. 작은 집의 벽면에 붙어 있는 거대한 TV는 보기 싫을 뿐 아니라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해친다.
TV 튜너를 내장한 23인치 이상의 모니터 시장이 급격히 성장한 건 이런 1인 가구 소비자가 몰렸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결국 소형 TV들이 잠식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대형 모니터 시장이다. 이 20인치대의 소형 TV들은 고화질 영상 입출력(HDMI) 기능을 내장해 PC 모니터 대신 쓸 수 있다. 게다가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의 등장으로 굳이 책상에 앉지 않아도 간단한 업무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실제 가격도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까 소형 TV와 대형 모니터는 사실상 같은 시장 안에 있는 셈이지만, 같은 값이면 ‘TV 시청이 가능한 모니터’보다는 ‘모니터로도 쓸 수 있는 TV’로 수요가 몰린 것이다.
큰 TV의 꿈은 유효하다
올해는 런던올림픽이 열린다. 가전업체들도 올림픽을 대비해 수많은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TV가 있다. 물론 핵심은 초대형 3D TV다. 모든 전자제품은 크기가 클수록 이윤이 많이 남으니까. 그리고 올림픽 마케팅 소외지역에 이 소형 TV들이 있다. 특별한 마케팅 없이도 1인 가구를 겨냥한 이 제품들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다. 대형 TV를 살 돈이 없으니까, 혹은 큰 집을 가질 수 없으니까. 큰 TV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작은 TV를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소형 TV로 올림픽을 시청하며 환호와 탄성을 동시에 내지를 것이다. 왜 이렇게 소형 TV가 잘 팔릴 수밖에 없는지 다음 정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정부는 말해봐야 모를 테니까.
이기원 정보기술(IT) 칼럼니스트
삼성전자 HDTV 모니터 TA950
LG전자 시네마 3D TV MX278D
LG전자 14인치 클래식 TV 14SR1E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