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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를 추억하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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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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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선봬는 흑백만화책 <체 게바라>와 추모음반 <게바라여 영원하라>

체 게바라는 더이상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니다. 유럽 젊은이의 가방에, 미국 젊은이의 티셔츠에, 아시아 젊은이들의 컴퓨터 스크린 세이버 속에 살아 있는 패션이다. 97년 30주기 때 유럽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체 게바라 열풍은 3년 뒤, 치료행위를 거부하는 한국 의사들의 책꽂이에까지 그의 평전이 꽂힐 정도로 전 지구적 현상이 됐다. 쏟아져나오는 게바라표 팬시상품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은 최근, 무덤 속의 체 게바라도 만족스러워할 만한 책과 음반이 나란히 나왔다.

훈장처럼 느껴지는 인쇄상태 흠집들

지난해부터 유럽의 예술만화를 소개하고 있는 현실문화연구에서 발간한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의 삶을 음영깊은 흑백의 선으로 그린 만화책이다. 중간 톤 없이 강렬한 필치와 역동적인 화면으로 꽉 찬 이 책은 게바라의 어린 시절, 각 전투지역과 과정,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7개 단락으로 나누어 그렸다. 작가는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연대기를 정리하면서 사이사이 사건과 관련된 유년, 그리고 청년 시절의 기억을 끼워넣는다.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 영웅 체 게바라와 인간 체 게바라는 하나의 뿌리 위에서 가지를 피운다.


68년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발간된 <체 게바라>는 주인공만큼이나 유명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초판이 발간되자마다 유포를 금지했다. 군부독재의 폭력이 극에 달하던 1973년에는 아예 원본을 없애버렸다. 같은 해 이 책의 스토리를 짜넣은 아르헨티나의 대표적 저항 작가인 엑토르 오에스테르엘드는 딸들과 함께 실종됐다. 아르헨티나 만화계의 거장으로 만화를 통해 독재정권을 비판했던 이 책의 그림작가 알베르토 브레시아 역시 정치적 탄압으로 고초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일부 남아 있던 판본이 돌면서 저항적인 젊은이들 사이에 고전이 됐고, 아르헨티나를 빠져나간 판본이 책으로 재출간될 수 있었다.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발견되는 인쇄상태의 흠집들이 옥에 티가 아니라 훈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처럼 만화 <체 게바라>가 겪어온 세월이 게바라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알레스 뮤직(구 명음레코드)에서 수입한 <게바라여 영원하라> 역시 60년대에 처음 세상에 나온 음반이다. 게바라가 세상을 떠났던 1967년, 쿠바의 국영 레코드사인 에그렘 레코드사 소속의 아티스트들이 만든 추모앨범으로 30주기인 97년 영국에서 재발매됐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이후 국내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홍수를 이루는 쿠바음악들과 다소 색깔이 다른 이 음반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혁명 전후 쿠바의 음악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혁명 전 쿠바음악은 아프리칸 리듬과 미국 재즈, 그리고 쿠바의 전통음악이 결합된 트로바가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자본가 계급은 미국 재즈를 선호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정부는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가장 쿠바적인 음악’들을 장려했다. 에그렘 레코드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누에바 트로바’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중남미 전역의 음악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혁명정부의 문화정책은 대부분 대중의 실정과 동떨어진 것으로 반발을 받는 데 비해, ‘누에바 트로바’는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만 앞세우지 않고 전통음악과 이미 토착화된 재즈를 큰 틀 안에서 원만하게 흡수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혁명정부의 음악에는 다른 공산혁명국가의 예술작품과 달리 정치색이 없는 서정적인 음악도 존재할 수 있었다. 21세기에 쿠바음악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음반의 앞 뒤에는 65년 피델 카스트로가 하바나의 혁명광장에서 낭독했던 체 게바라의 편지가 당시의 육성으로 담겨 있다. 체의 목소리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마지막 구절 ‘승리여 영원하라’,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을 외치는 카스트로의 목소리에는 신념과 열정,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짧은 생을 불태웠던 게바라의 견결한 육성이 배어나오는 듯해 감동적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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