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이 예술하고 돈 없이도 살 권리를 주장하는 성공회대 20대 노숙모임 ‘꿈꾸는 슬리퍼’에서 활동하는 회원들. 왼쪽부터 정훈(29)·범삼(21)·아노미(23)·김이민경(24)씨 등. <한겨레21> 탁기형
추운 날씨, 유례없는 한파의 체감온도를 더 낮추는 철강소 금속성 자재들의 비주얼을 뚫고 골목 귀퉁이 어디쯤에서 문래창작촌 LAB39호에 들어섰다. 온기 없는 사면 벽에는 종이박스에 그린 그림들이 조각조각 걸려 있다. 이것은 분명 전시회. 성공회대 노숙모임 ‘꿈꾸는 슬리퍼 지지전(展)’이다. ‘20대 현실의 가공 없는 볼거리’란 부제도 있다. 그림의 주제어들은 대략 이렇다. ‘스펙!!’ ‘최고의 알바 최악의 알바’ ‘꽃다운 19살, 당신의 고삼은 어땠나요?’ ‘시험 잘 봐. 근데 시험 잘 봐서 뭐해?’ 주제어 주변에는 깨알 같은 그림들이 걸려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쪽을 보자. “느티에서 팔아요, 순대네 주먹밥” “삼각김밥 2개 1,400원, 참치김밥 2,000원, 돈 없을 땐 뽀글이” “아침 GS25 점심 GS25 저녁 GS25 나한테 감사패 줘야 함” “♡←이거 먹고 삼”.
“학교에서 살아보자, 텐트를 치고”
이 작품들은 2011년 2학기 동안 성공회대 ‘꿈꾸는 슬리퍼’들이 매주 수요일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학교에서 벌인 창작활동의 결과물이다. 주제어를 공들여 정해 걸면 지나가던 학생들이 와서 그림을 그린다. 원래는 도화지로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돈이 들어서 종이상자로 품목을 바꿨다. ‘돈 없이도 예술한다’는 ‘꿈꾸는 슬리퍼’가 추구하는 생각이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미술을 하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미술하는 사람은 왠지 대단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죠. 평범한 사람들도요. 그래서 시작했어요.”(범삼) “글로 쓰는 건 교수님 같은 분들이 우리보다 잘 쓰죠. 젊은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재미있는 형식으로 할까를 고민했어요.”(아노미)
전시회와 함께 ‘우석훈 없이 88만원 세대 말하기’라는 주제로 수다회도 가졌다. ‘청춘’ ‘88만원 세대’ ‘삼포세대’ 등 많은 수식어들에도 불구하고 ‘인용되는 대상’이지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식이 있다. 당사자가 당사자 얘기를 하는 걸 가로막는 권위 구조가 더 많은 다양함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꿈꾸는 슬리퍼’는 ‘노숙 모임’이다. 노숙 장소는 대학 캠퍼스. 정훈씨가 노숙을 하기 시작한 계기는 이렇다. “집이 멀어서 친구집에서 신세를 많이 졌어요. 나중엔 친구가 열쇠를 주면서 편하게 자고 가라는데, 미안하더라고요. 내 집을 가지고 싶어졌죠. 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집을 알아보았는데 보증금에 월세에…,. 내 알바비가 얼만데. 내 형편으로는 절대 집을 못 가진다는 걸 알았어요. 또 그건 저뿐만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요.”
그래서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살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학교에는 화장실도 있고 샤워실도 있으니 잠만 해결한다면 살 수 있겠지 싶었다. 몇몇이 모여서 박스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이상자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탓에 이 건축물은 실패하고 만다. 텐트를 기부받은 뒤에야 노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게 3년 전 2009년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다. “맨 처음엔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내일 뭐라고 할까, 조마조마해하며 잠들었죠. 얘기를 들어보니까 지역주민들이나 친구들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했죠.”
처음엔 저녁에 텐트를 치고 아침엔 걷었다. 침대, 두꺼운 장판 등 보온장비를 매일 철거하고 설치하는 게 힘들었지만 학교 쪽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몰래 전기를 끌어다 쓰면 학교 쪽이 청소하는 아주머니나 경비 아저씨들을 시켜서 ‘좀 치우라’고 했다. 그러면 텐트를 걷었다 다시 쳤다. 또 하고 또 했다. 3년쯤 되자 학교 홍보처에서 항동아트센터의 활동 자료 사진을 만든다며 (정훈씨의 텐트를) 학교 홍보자료로 배포해도 되는지 물어왔다. 일종의 인정인 셈이었다. 아예 고정적으로 텐트를 설치하고 지낸 지는 이제 1년이 됐다.
“우리는 두 가지에 주력해요. 20대의 빈곤 문제와, 가난해도 어떻게 지속 가능한 삶을 살 것인지죠. 빈곤 문제를 20대로 한정짓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이 문제의 당사자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죠. 빈곤 문제는 대학생을 위한 정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비정규직과 주택 문제는 모든 세대의 문제예요. 빈곤의 주체들이 대학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다양한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죠. 그러니까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태도보다는 가난해도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리는 방식을 찾게 되는 거죠.”(범삼)
빈곤은 일상의 문제에서 비롯
‘노숙’이라는 말로 인해 다양한 오해도 많이 샀다. 언론들이 파산한 청춘의 극단적인 사례로 이들을 인용하려 할 때도 있었고, 방긋 웃으며 ‘저희 텐트로 놀러오세요’와 같은 방송용 멘트를 요구받기도 했다. 애초에 ‘노숙’이라는 말을 모임명에 사용할지에 대해 찬반이 팽팽했던 것도 이런 결과를 우려해서다. 그러나 이들은 빈곤이 곧 일상생활에서 비롯한다는 본질적인 문제가 그들 사이에서 진작되고 그들을 통해 알려지기를 바란다.
지금은 1년 정도 된 ‘밥모임’에서는 먹거리에 도전했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 먹을 수밖에 없는 인스턴트 음식과 가격 대비 질 나쁜 ‘학식’(학교식당 밥)에서 벗어나려고 꾸린 모임이다. 2주일에 1인당 1만원의 돈을 가지고 오면 11명 정도의 꿈꾸는 슬리퍼들이 함께 밥을 해먹을 수 있다. “다른 학교에도 ‘저항의 텐트’가 늘었으면 좋겠어요. 경희대, 가톨릭대, 고려대에서도 찾아왔죠. 좀더 많은 친구들과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텐트 기부, 환영합니다. 지금 텐트 지퍼가 고장났거든요.”
동이향 극작가·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