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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상을 바꿀 ‘아무개들’

‘점령하라’ 시위대에서 새로운 사회운동 세력인 ‘아무개 집단’의 출현을 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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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17 14:0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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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너?’

2008년 촛불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놀란 이명박 정권은 ‘배후’를 궁금해했다. ‘선량한 시민들이 괜히 저럴 리 없다. 분명 뒤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 하다못해 내놓은 게 “대체 저 많은 촛값은 누가 다 대는 거냐”는 물음이었다. ‘그분’이 뒷산에 올라 멀리서 들려오는 <아침이슬>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신 것도, 끝내 ‘배후’를 찾아내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저임금 위해 최고임금 상한제를

그 ‘배후’의 정체는 2월13일 발행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 디플로>) 한국판 2월호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아무개’(Anonymous)다. 펠릭스 스탈더 스위스 취리히예술대학 교수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가는 ‘아무개’ 집단을 “하나의 조직이나 네트워크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먹고 사는 여러 무리”라고 풀었다. 그러고 보니, 2011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월가 점령운동은 2008년 한국의 촛불시위와 닮아 있다.

지난해 9월 일부 젊은이들이 미국 금융의 심장부를 처음 점거했을 때, ‘운동’의 목적은 불분명했다. 시위대는 변변한 ‘요구사항’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공원에 텐트를 치고, 자본의 탐욕과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중구난방 찧고 까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점령운동은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간의 생각 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스탈더 교수는 스웨덴 해적당 창립자 리크 팔크빈게의 말을 따, 이들 ‘아무개 집단’의 특성을 이렇게 짚었다.

“모든 사람은 자발적 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그들을 이끄는 방법은 그들에게 소속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무리에 속한 개인은 모두 자발적 참가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중시하는 사안에 대해 해당 집단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합류한다. 그 안에서 그룹을 이끄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샘 피지가티 미 정책연구소(IPS) 연구원이 쓴 ‘최고소득에 상한을 정하라’는 글은 촛불시위나 점령운동만큼 신선하다. 기껏 ‘최저임금 보장’에나 기울여온 관심의 영역을, 그 쌍둥이 격인 ‘최고임금 상한제’로 확장시켰다. ‘최저임금’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최고임금’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논리는 자연스럽다.


피지가티 연구원에 따르면, 최초로 이 개념을 제안한 철학자 펠릭스 애들러는 “다양한 연령대의 노동자들을 착취해 쌓은 거대한 부가 미국의 정치적 삶을 부패시킬 것”을 염려했단다. 그가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에 최고 100%까지 세금을 물리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이를 통해 “해당 개인은 ‘인간적 삶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는 대신, ‘남에게 과시하고 우쭐대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재산’은 잃게 될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식량의 금융자산화’를 비판하다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 스위스 제네바대학 교수의 글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 세네갈의 시골마을 장터에서 최근 몇 년 새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사실을 확인한 지글러 교수는 “자본시장이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농산물이 펀드로 둔갑한 시대, ‘식량의 금융자산화’를 질타한 게다. 그는 “투기 자본가들이 원자재, 특히 식량에서 완전히 손 떼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하이너 플라스베크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수석 경제학자의 말을 따 이렇게 강조했다.

“농산물 주식 가격 형성에 대한 세계적 규제에 나서야 한다. 오로지 생산자, 상인, 농산물 이용자들만 최종적으로 시장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투기 자본가들은 농산물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농식품 시장은 자본화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각국 정부의 의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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