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뽕도 넣고, 땅에 못을 치듯 걸어야 할 거다
느닷없이 찾아온 숨을 들이쉬지 못하는 고통!
그건 첨 들어보지? 그 속에서 아기를 밖으로 밀어내야 할 거다
아니면 아기를 떼고 땅에 머리가 처박힌 참새 신세가 될 거다
그 버릇없는 표정은 제거 수술을 받아야겠다
너는 아무래도 얼굴에 칼을 대는 날이 올 거다
평생 교실을 떠날 수 없듯이 평생 부엌도 떠나지 못할 거다
(중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슴속의 그물이 아파
더러운 공기를 내보내지 못할 것이고
세상의 두꺼비들이 다 미쳐 날뛰는 것을 볼 것이고
그놈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시집을 가야 할 것이다”(‘출석부’ 중에서) 김혜순의 새 시집 <슬픔치약 거울크림>(문학과지성사 펴냄·2011)의 한 대목이다.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교무실 담임선생님의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있을 때, 지나가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출석부로 내 머리를 후려치면서 퍼부은 말이다. 저런 예언들은 으레 다음과 같은 말을 뒤에 거느린다. ‘그러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모범생이 되도록!’ 이런 가르침들이 “버릇없는 표정”을 한 아이들의 표정을 바꾼다. ‘나’는 훗날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시집 전체를 꼼꼼히 읽어야 할 텐데 그중 한 편의 시에서 ‘나’는, 첫차가 도착하지도 않은 지하철역에 서서, 어쩐지 “모두 작별해버리고 싶은 아침”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작별의 전사
나는 죽을 아이를 생산한 몸
나는 마이너스 생산 기계
나랑 더해지면 누구나 마이너스누구누구가 되어버리지
내 음악은 왜 빼기만 하고 더하기는 할 줄 모르는지
내 음악에 실려 내가 초음속으로 사라져간다 이 동네는 그 누구도 타락을 선택할 자유가 없는 곳
모두 달려들어 치유해주겠다고 난리를 치는 곳
그러나 나는 당분간 타락천사와 살림을 차리겠다 내가 내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곳, 안녕
내가 내 병명을 지을 수 없는 곳, 안녕
내일 아침은 내 침상에서 새 질병으로 태어날 거야
그 질병에 나를 꽂을 거야
그러니 모두 안녕
이제 마이너스 당신이 된 당신님도 안녕”(‘아침 인사’ 중에서) ‘학생주임 선생님’의 시선으로 본다면 지금 ‘나’의 삶은 결코 ‘생산적’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게 ‘나’의 자체 평가다. 그렇다면 예언이 실현된 것인가. 그러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동네”의 기준대로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생에서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를 누가 함부로 정할 수 있는가. 누가 “타락”을 규정하고 “치유”를 강제하는가. 시인이 이 사회를 “내가 내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곳”이자 “내가 내 병명을 지을 수 없는 곳”이라고 규정한 것은 지극히 명쾌해 보인다. ‘성명’은 출생과 동시에 ‘나’를 얽어매는 그 많은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병명’은 그 요구를 거절한 주체들을 분류하고 통제하는 폭력적 기준을 상징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그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고 이렇게 선언한다. “새 질병으로 태어날 거야/ 그 질병에 나를 꽂을 거야.” 이 재치 있는 구절에서 질병은, 병(病)과 병(甁) 사이의 말놀이를 거쳐, 꽃병으로 변신한다. 거기에 ‘나’를 꽂겠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성명/병명을 반납하고 주체적인 성명/병명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시라는 질병을, 계속 앓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혹은 다른 모든 여성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기 위해, 시인 김혜순은 30년 넘게 시를 써왔다. 놀랍지도 않지만 이번 책은 김혜순의 열 번째 시집이다. 그녀의 신간을 읽고 실망하는 날은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