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이명석씨는 2000년대 좀비 문화의 대두를 루저 문화의 확산으로 읽는다. 외면적으로는 B급 문화의 오버그라운드 진출로 읽을 수 있고, 내면적으로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녹아든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나는 전설이다>(2007)에서 좀비들은 아주 빠르게 달려들어 공격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좀비는 뭔가 힘없이 꾸무럭대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무기력하고 빛을 싫어해 밝음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런 면 때문에 좀비는 소수들에 대한 은유로 자주 읽히기도 한다. 예컨대 고전적 공포 캐릭터로서 자주 차용되는 뱀파이어는 센 존재다. 자의식이 강하고 영생하며 피부도 생글생글하고, 미남자·미소녀에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로 그려진다. 좀비는 정반대편에 서 있다. 특별한 능력도 없고 인육을 갉아먹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뱀파이어가 상류층이라면 좀비는 루저 혹은 하류층으로 비유할 수 있다.”
미국 뉴욕의 월가시위에서 사람들이 그로테스크한 좀비 분장을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이씨는 이들의 행위 뒤에 숨은 뜻을 두 갈래로 해석했다. “시위대가 세상의 99%인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뜯어먹힌 좀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1%의 월가 사람들을 자신들을 뜯어먹는 좀비로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길거리를 아무 의식 없이 걸어가는 좀비의 이미지는 노숙인 이미지와 겹치기도 하는데,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실직자,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젊은이들이 자신을 좀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좀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들의 목을 깨물고 팔을 잘근잘근 씹으며 좀비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원흉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우리를 해치려고 달려드는 좀비 같은 존재로서 자본가들 또한 좀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좀비 코드의 확산은 전세계적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가장 많이 읽힌다. 소설가 스티븐 킹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테러리스트와 같은 존재로 좀비를 그리듯,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 이 괴력자들은 마치 슈퍼 바이러스처럼 강력하게 인간들을 좀비화한다. 사스(SARS), 신종플루, 구제역 등 전세계를 빠른 속도로 공포로 몰아갔던 치명적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좀비에게 쫓기는 인간의 심정과 같을 것이다. 좀비는 ‘나을 수 없는 병’처럼 인간 세계를 황폐화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좀비를 이겨낼 수 있는 백신이나 처방이 간혹 등장하지만 결국 무용한 것으로 결론지어지고 만다. 인간의 대응보다 빠르게 번져나가는 신종 전염병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유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에 걸쳐 다양한 콘텐츠로 영역을 확장하며 좀비는 괴기와 공포를 조금 벗어던진 듯하다. 오래된 공포의 전형에서 이제는 대중과 친근해진 공포 캐릭터로서 좀비는 고어(gore)한 와중에도 조금은 측은한 존재로 그려진다. 한국의 좀비물은 외국의 것과 비교해서 특히 그렇다.
한국의 좀비, 측은한 이웃
매해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공모전’을 진행하는 출판사 황금가지 편집부의 김준혁 부장은 “외국의 좀비물이 넓은 지역에서 행해지는 서바이벌에 가깝다면, 한국의 좀비물은 갇힌 사람들이 대면해야 하는 공포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미 좀비 문학을 이렇게 비교했다. “특히 미국은 나라 자체가 워낙 넓다 보니 좀비를 피해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 작품에서는 반지하방·아파트·빌라·학교 등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대처 방식도 달라진다. 미국은 총기 소유를 허락하다 보니 총으로 좀비에 맞서지만, 한국은 좀비 발생 사태를 수습하려고 총을 가진 군대가 등장한다. 또한 외국 좀비물의 경우 대부분 ‘인류 생존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을 끌어들이지만, 한국 작품에선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야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좁은 공간, 세밀한 디테일, ‘지금, 나’에 집중하는 한국 좀비물에서 인간과 좀비의 거리는 좁다. 총으로 쏴 죽여야 하는 적으로서만의 좀비가 아닌, 한때는 나와 같은 모습을 지닌 가까운 존재로서의 한국형 좀비는 그래서 조금 안 됐고, 그들을 파괴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현실이 슬프다.
좀비와 인간의 밀착한 거리 탓인지 한국 좀비물들은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좀비가 불쑥 솟아오르는 경우가 많다. 김준혁 부장의 풀이는 이렇다. “한국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극한 상황을 통해 응집되고 가라앉은 일상의 문제들이 폭발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가족사, 학교라면 교내 폭력이나 사제지간의 갈등, 비리 등의 문제가 좀비라는 더 큰 공포를 배경으로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셀>,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 등이 좀비의 출현과 존재를 알리지 않는 권력층의 거대한 비밀과 그에 따라 온 세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공포를 그린다면, 한국 작품들은 생활의 소소한 디테일들을 좀비 코드라는 배경에 입히는 편이라는 것이다. 권정은의 단편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는 좀비 코드를 배경으로 가족 붕괴를 다루고,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학교라는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공포에 의해 폐쇄된 환경에 갇힌 사람들의 관계가 이기와 불신으로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그린다.
오버그라운드를 배회하는 좀비들은 공포물이나 좀비 코드에 천착하지 않던 작가에게도 소재로 낚인다. 김중혁의 소설 <좀비들>에 등장하는 좀비는 썩어 문드러진 사지를 질질 끌고 다닌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좀비와 다를 바 없지만, 대척해야만 하는 절대 악, 끔찍한 전염병의 상징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무자비한 인간들에게 붙잡혀 ‘사체 실험’ 대상으로 팔려나가는 불쌍한 존재다. 또한 한때 우리 이웃이나 가족이었고, 살아남은 이와 죽은 이의 중간자로서 “이것은 좀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좀비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화제를 모으며 영화로 제작 중인 소설 <웜 바디스>를 쓴 아이작 마리온도 이전에 한 번도 좀비물을 쓴 적이 없다. 작가는 기존 좀비물의 공식을 내던졌다. 오로지 인육을 먹는 데만 집착하던 좀비에게 의식을 부여했다. 좀비와 인간이 대치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지구에서 이 두 존재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로맨스적 요소를 불어넣은 소설은 서점 책꽂이의 ‘공포소설’ 카테고리보다는 ‘로맨스소설’ 코너에서 찾는 편이 빠를 것이다.
공포의 일상화란 비극이 오지 않도록
땅밑에서 활동하던 좀비들이 우리 곁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멀게만 느껴졌던 거대한 공포가 일상화했다는 뜻인 걸까. 전염병은 언제든 우리의 일상을 쉬이 침범할 수 있고, 자본가들의 패악은 결국 나약한 99%와 힘센 1% 모두를 좀비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나와 다른 모두를 좀비, 곧 적으로 내모는 시선들이다. 좀비(로 상징되는 다종다양한 공포)에 내몰린 우리는 신뢰와 지지의 관계를 벗어던지고 서로를 감염자로 의심하며 상대방에게 칼끝을 드리우게 될 수도 있다. 좀비가 되기 이전에 악마가 되어버린다는 비극. 그러나 한 줄기 다시 희망인 것은, <좀비들> <웜 바디스> 등에서처럼 좀비라는 존재를 측은하게 혹은 의지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공포 뒤에 숨은 정서를 읽어내고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바로잡으려는 노력 혹은 의지가 아직 인간에게는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 혹은 기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