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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믿는 혹성에 발등 찍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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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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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의 상상력 뛰어넘지 못한 팀 버튼의 <혹성탈출>… 비판도 조롱도 없는 ‘농담의 연장전’

블록버스터의 장마 시즌, 또 하나의 블록버스터 <혹성탈출>(8월3일 개봉)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1968년 처음 개봉할 당시 충분히 화제가 됐던 작품의 리메이크라는 점이고, 둘째는 할리우드의 괴짜 팀 버튼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로 인해 첫 번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된다. <화성침공>(1997) 같은 황당하고 짓궂은 SF영화로, 온갖 폼 다 잡는 할리우드 SF영화들을 골려줄 수 있는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기다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보적 원숭이 아리의 빼어난 연기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장을 나오면서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기분을 느끼는 관객이 꽤 많을 것 같다. 팀 버튼의 열렬한 팬이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2001년판 <혹성탈출>에 ‘올 여름 최악의’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관객이 실망하는 것은 이 영화가 비범하지 않다는 점이다. 배트맨이라는 낡은 만화책 속의 주인공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던 팀 버튼이 <혹성탈출>에서 보여주는 미래 세계는 전작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2029년, 미공군으로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레오 데이비슨 대위(마크 월버그)는 인공적으로 지능을 개발시킨 침팬지들에게 우주선 조종법을 가르친다. 자기폭풍을 탐사하기 위해 보낸 침팬지 우주선의 송신이 끊기자 그는 침팬지를 구조하기 위해 직접 나서지만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다. 그가 도착한 행성에서는 침팬지가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곳. 그는 침팬지들의 포획을 피하면서 원시상태로 살아가는 인간 무리들과 함께 쫓겨다니다가 노예로 잡힌다. 거대한 침팬지 사회에서 그는 인간군상처럼 다양한 침팬지 무리를 만난다. 인간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는 한 침팬지의 도움으로 도시를 탈출하지만 침팬지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땅에서 추락한 우주정거장을 발견한다.

시간여행, 원숭이가 지배하는 미래사회, 끝내 찾지 못하는 고향 등 2001년판 <혹성탈출>의 얼개는 68년도 버전과 비슷하다. 30년간의 시간이 만든 진화가 있다면 새로운 <혹성탈출>에서 인간은 말할 수 있게 됐고, 원숭이들은 분장에서 동작까지 좀더 실제 원숭이 같아졌다는 점 정도. 잔인한 테드 장군을 연기한 팀 로스는 ‘인간인가, 원숭이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훌륭하다. 인간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 분개하며 “인간을 저렇게 다루면 우리도 인간과 다를 게 없어”라고 외치는 진보적인 원숭이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도 빼어나다. 반면 만날 “나는 미공군이에요”만 반복하는 마크 월버그는 영웅주의를 배제하려는 팀 버튼의 의도라고 해도 너무 밋밋하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성과 남성성을 잃지 않았던 전작의 주인공 찰턴 헤스턴을 비교하면서 마크 월버그는 “텅 비어 있다”(blank)고 혹평하기도 했다.

사진/ 원숭이들이 분장해서 동작까지 좀더 실제 원숭이 같아졌다는 게 이번 <혹성탈출>의 진화라고 할 수 있을까.
마지막 반전, 다섯가지 버전 찍었지만…

물론 이 작품에서 팀 버튼식의 냉소적인 유머는 곳곳에 돌출한다. 원숭이들의 성지 칼리마(calima)가 추락한 우주정거장의 내부에 적혀 있는 ‘Caution-Live-Animals’에서 지워지지 않은 글자의 조합이었다는 발견이나, 레오보다 늦게 도착한 우주선 침팬지가 ‘민족의 영도자’로 떠받들어지는 장면 등등. 그러나 <혹성탈출>에서 농담은 자질구레하게 느껴진다. 시니컬한 농담들을 응축시키는 팀 버튼의 기괴하고, 환상적이며, 독창적인 세계는 없다.

68년 개봉했던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허리 잘린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떨어졌던 이상한 행성이 미래의 지구임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당시 베트남전을 일으키며 세계를 자기 손에 틀어쥐려던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 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2001년도 <혹성탈출>의 마지막 반전은 감독이 다섯가지 버전을 찍은 다음 결정할만큼 공을 들였다지만 비판도 없고 조롱도 없다. 그저 농담의 연장전처럼 느껴질 뿐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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