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 티 캐스트 제공
그는 왜 광인처럼 욕을 했나 김기덕이 <아리랑>에 담은 것은 절반 이상이 자학하는 모습이다. 아무도 없는 산골,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소주를 들이켜며 그는 자신에게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 왜 영화를 못 만들고 있느냐고 다그친다. 자신을 배신한 후배 감독의 이야기도 나오고 <비몽>의 배우가 죽을 뻔한 사연도 나오지만, 김기덕도 관객도 그가 왜 그렇게 지내는지 명확한 답은 알지 못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는 외부와 접촉을 끊고 자학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대의 디지털카메라를 놓고 자신을 찍기 시작한다.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기 안에 갇힌 자신을 끄집어내 인터뷰 자리에 앉힌다. <아리랑>은 다른 셀프 다큐멘터리처럼 김기덕의 솔직한 심정을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많은 경우 이런 다큐멘터리는 자신을 얼마나 드러내느냐가 관건이다. <아리랑>에 관한 기사나 평도 대체로 김기덕이 토로하는 사실에 집중하며 김기덕의 속내가 얼마나 보이는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김기덕을 폐인으로 만든 것이 후배 감독의 배신이냐 아니냐가 초점이 된다. 혹은 내가 왜 김기덕의 신세 한탄을 들어줘야 하나 싶어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김기덕이 하는 말의 내용에만 집중한다면 <아리랑>은 김기덕의 자학적 하소연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셀프 다큐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간다. 김기덕을 인터뷰하는 김기덕에 이어 그 장면을 편집하는 김기덕과 그림자 김기덕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평면에서 입체로, 일방적인 메시지에서 다층적인 텍스트로 변해간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김기덕의 오두막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다. 지극히 사실적이던 영화는 여기서 초현실로 이행할 준비를 한다. 다큐에서 극영화로 전환되는 이 미묘한 흐름은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총을 만들어 누군가의 집에 찾아가 방아쇠를 당기는 김기덕. 그는 여기서 연기자 김기덕이 되어 상상의 살인을 실천에 옮긴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정해놓은 앵글에 들어가 기계적인 정확함으로 살인을 연기하는 <아리랑>의 엔딩은 100% 판타지다.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던 김기덕은, 이제 스스로 배우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서서 그의 마음에 응어리진 분노를 상상적 살인으로 해소한다. 자신의 병적 집착과 분열 증상을 극영화 재료로 만들어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아리랑>. 티 캐스트 제공
올해 칸영화제에서 <아리랑>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으며 화제가 됐다. 김기덕에게 그 상이 큰 위로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용기를 얻은 결과, 그는 한 대의 카메라와 배우 한 명을 데리고 다음 영화 <아멘>을 만들었다. <아리랑>의 제작 방식인 100% 원맨 시스템으로 만든 장편영화. <아멘>은 그렇게 찍어도 시적 감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실험하는 영화로 보인다. 언젠가 언론에 공개된 편지를 통해 김기덕은 거대 자본에 맞서 적은 돈으로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노라 복수의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그게 가능하다고 우기는 중이다. 김기덕의 복수는 이뤄질까?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지금 세상에 맞서는 김기덕의 방법이 옳다는 것이다. 창작만이 그를 구원할 것이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필름마켓 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