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공무술 일산도장 오평원 관장 “천명이 덤비면 난 세명은 패?”
특공무술 일산도장 오평원 관장과의 대결을 위해 축지법을 써서 중원으로 달려갔다. 대한특공무술협회에서 추천한 오평원(36) 관장은 검은 도복을 엄숙하게 걸치고 결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도장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단 <한겨레21>을 아시냐고 물었다. “아, 예,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무림에서는 주로 무얼 보시나요? “아, 우리는 스포츠 신문을 봅니다.”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이번에는 그가 내게 물었다. “우리 특공무술은 어떻게 아시게 되었나요? 저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홈페이지라니요? 길 가다가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를 봤는데요. 그는 적이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특공무술 단원모집 포스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상: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 여성부, 체대희망자, 군경입대자, 경호원 희망자, 개인특별 지도반, 사범반. 물샐틈없이 전 인구집단을 망라하고 있었다. 따라서 누가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특공무술의 장점은 무엇인가?
친구들이 자꾸 폼을 잡는 바람에…
“저는 우리 무술만이 최고다 하는 그런 주의는 아닙니다” 하면서 오 관장은 대인의 넓은 마음자세를 보여주었다. 열아홉에 특공무술에 입문하기 전 그는 몇 가지 운동을 해보았지만 특공무술이 난이도도 높고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고 한다. 말로 백마디 하면 무엇하랴. 일단 한번 시작해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느니. 특공무술의 기원은 박통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대테러부대가 창설되어 특수기법의 무술개발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전국의 무술대가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게 되었다. 그중 현재 특공무술협회의 장수옥 총재가 선발되어 특수부대원들의 무술연마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 이후 특공무술은 새로운 국기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오 관장 사무실에는 장 총재가 DJ를 포함한 역대 대통령들과 악수하는 사진이 여럿 걸려 있다. 숱한 역사의 드라마를 뛰어넘어 특공무술은 무예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 총재는 9단. 오 관장은 총재님이 날아다니신다고 했다. “실력으로나 무술인의 자기관리라는 점에서 우리가 매우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분이지요. 두 사람이 올라서서 들고 있는 벽돌을 제자리에서 거꾸로 뛰어오르면서 격파한다는 것은 엄청난 실력이거든요.” 특공무술 고수가 되면 지붕 위로도 날아오를 수 있겠네요? “아, 그런 건 영화에서 나오는 얘기지요.” 오 관장은 나의 무지를 일축해버렸다.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한 것쯤은 나도 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국 총 80여개의 도장 중에서 오 관장은 경기서북부 지역에서 가장 연륜이 오래된 특공 무인이다. 서울시내에서 수련생 양성에 힘쓰다가 일산쪽을 개척하라는 총재의 명을 받들어 떠나온 것이 어언 5년이 되어간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 부모는 시골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동생들은 아래로 셋이었다. 병역도 집안 생계 때문에 면제받았다. 기술학교를 마치고 부천 공장에서 일하다가 친구들이 이미 배운 특공무술로 자꾸만 어깨를 툭툭 치며 폼을 잡는 바람에 열받아 도장을 찾아갔다. “처음엔 겁이 났지요. 모두 똑같이 절도있게 하는 걸 보니 무슨 소림사 영화보는 것 같았지요. 나로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동작도 어렵고.”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나서는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그의 성격이 ‘독하게’ 변해 최고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희한하데요, 나도 하니까 되더라고요, 아, 나도 되는구나 싶었지요.” 마침내 그는 앞서 입단한 다른 수련생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유단자가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제 인생을 바꿔버렸어요. 운동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특공무술로 몸과 마음을 연마하면서 젊은 그는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미를 터득했다. “맨주먹 하나로 고향에 가서 부모형제들 몽땅 데리고 올라왔지요.”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해 동생들 학교보내고, 결혼시키고, 본인 장가가고, 집사고, 체육관 운영하고, 부모님 모시고 산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엄청 혹독한 훈련으로 그를 길러냈다. 강인한 마음을 심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포기해버리게 마련이라고 오 관장은 주장한다. “요즘 아이들은 상당히 나약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체육관을 다니게 되면 체력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으로 강해지는데 정작 부모들이 파토를 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컷 잘 다니다가도 시험성적이 나쁘면 당장 아이를 체육관에 못 다니게 하는 부모들이 많다면서 오 관장은 ‘상당히 안 좋은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부모의 관점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커트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군 특수대원들을 가르치는 자부심
그는 체력단련은 결국 인성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가르칠 때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예의를 가르칩니다.” 아무리 성질이 나도 참을 줄 알아야지 진정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주먹을 쓰기 위해서 체육관에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법을 배우러 온다는 것이다.
“체육관에서 아이들을 나쁘게 가르칠 리가 없잖아요. 가정, 학교, 학원에서 못 가르쳐주는 것을 체육관에서 가르쳐줍니다. 스트레스도 풀고, 땀을 흘려야 정신이 맑아지거든요. 사춘기 때 남는 힘을 운동으로 풀고. 사실 시기적으로 학생 때가 아니면 운동할 시간이 없어요. 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기개발입니다.” 운동을 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인생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풀 수 있다는 것이 경험에서 우러난 그의 지론이다.
오 관장은 특전사 교육과 특공무술 지도자 양성에 참여했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제가 군대를 안 갔잖아요, 그냥 군부대를 지도해도 그럴 텐데 특수대원들이니 더욱 자부심을 느꼈지요. 사회에서 운동을 좀 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운동을 하려면 쌈도 좀 할 줄 알아야 했던 시절에 젊은 혈기를 보냈던 오 관장은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한 부분을 거론했다. “야, 덤벼봐, 천명이 덤벼도 난 한명만 패”라는 대사가 있는데 오 관장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한명을 잡고 팰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 나머지 999명에게 한대씩 맞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는 한명이 셋을 동시에 팰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전문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그의 두 아들은 특공무술 수련자. 부인 김찬미씨도 유단자. 체육관 운영을 측면지원하고 있다. 급하면 부인께 수련생 지도도 맡길 수 있겠군요. “전 그렇게 안 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집사람 능력을 인정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가 쉽게 생각할 수도 있고 수련생들도 배우는 자세가 흐트러질 겁니다. 아무리 내가 운영하는 도장이라 하더라고 가르치는 일만은 절도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련문화의 3대 폐단
오 관장은 수련문화가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현실을 우려한다. 3대 폐단, 즉 단비할인, 도복지급, 단증남발이 무림을 좀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질높은 수련지도에 있다고 오 관장은 강조한다. “타 단체보다 우리가 아주 힘들 겁니다. 그러니 저변확대에 있어서는 약하지요. 그러나 우리 단증을 획득하게 되면 그만큼 더 자랑스러워 하지요.”
무술인에게도 나름대로 애로가 있다. “우리는 싸우면 안 됩니다. 싸우다가 맞으면, 저런 엉터리, 폼만 잡더니 별거 아니라고 손가락질하고, 때리면 운동하는 놈이 사람 잡는다고 난리를 피우니 그저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사실. “우리 5단 이상은 사람 팼다간 살인미수예요. 살인미수.” 그는 엄중하게 덧붙였다. 사나이 ‘주먹이 운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오 관장은 이번 인터뷰 사진을 위해 꺾기시범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오 관장에게 ‘꺾이기’ 위해 후배인 탄현도장 윤 사범이 특별히 초빙되어왔다.
두 무도인이 내뿜는 기운으로 무더위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권은정

사진/ 특공무술 일산도장 오평원 관장.(박승화 기자)
“저는 우리 무술만이 최고다 하는 그런 주의는 아닙니다” 하면서 오 관장은 대인의 넓은 마음자세를 보여주었다. 열아홉에 특공무술에 입문하기 전 그는 몇 가지 운동을 해보았지만 특공무술이 난이도도 높고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고 한다. 말로 백마디 하면 무엇하랴. 일단 한번 시작해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느니. 특공무술의 기원은 박통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대테러부대가 창설되어 특수기법의 무술개발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전국의 무술대가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게 되었다. 그중 현재 특공무술협회의 장수옥 총재가 선발되어 특수부대원들의 무술연마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 이후 특공무술은 새로운 국기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오 관장 사무실에는 장 총재가 DJ를 포함한 역대 대통령들과 악수하는 사진이 여럿 걸려 있다. 숱한 역사의 드라마를 뛰어넘어 특공무술은 무예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 총재는 9단. 오 관장은 총재님이 날아다니신다고 했다. “실력으로나 무술인의 자기관리라는 점에서 우리가 매우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분이지요. 두 사람이 올라서서 들고 있는 벽돌을 제자리에서 거꾸로 뛰어오르면서 격파한다는 것은 엄청난 실력이거든요.” 특공무술 고수가 되면 지붕 위로도 날아오를 수 있겠네요? “아, 그런 건 영화에서 나오는 얘기지요.” 오 관장은 나의 무지를 일축해버렸다.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한 것쯤은 나도 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국 총 80여개의 도장 중에서 오 관장은 경기서북부 지역에서 가장 연륜이 오래된 특공 무인이다. 서울시내에서 수련생 양성에 힘쓰다가 일산쪽을 개척하라는 총재의 명을 받들어 떠나온 것이 어언 5년이 되어간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 부모는 시골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동생들은 아래로 셋이었다. 병역도 집안 생계 때문에 면제받았다. 기술학교를 마치고 부천 공장에서 일하다가 친구들이 이미 배운 특공무술로 자꾸만 어깨를 툭툭 치며 폼을 잡는 바람에 열받아 도장을 찾아갔다. “처음엔 겁이 났지요. 모두 똑같이 절도있게 하는 걸 보니 무슨 소림사 영화보는 것 같았지요. 나로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동작도 어렵고.”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나서는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그의 성격이 ‘독하게’ 변해 최고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희한하데요, 나도 하니까 되더라고요, 아, 나도 되는구나 싶었지요.” 마침내 그는 앞서 입단한 다른 수련생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유단자가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제 인생을 바꿔버렸어요. 운동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특공무술로 몸과 마음을 연마하면서 젊은 그는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미를 터득했다. “맨주먹 하나로 고향에 가서 부모형제들 몽땅 데리고 올라왔지요.”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해 동생들 학교보내고, 결혼시키고, 본인 장가가고, 집사고, 체육관 운영하고, 부모님 모시고 산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엄청 혹독한 훈련으로 그를 길러냈다. 강인한 마음을 심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포기해버리게 마련이라고 오 관장은 주장한다. “요즘 아이들은 상당히 나약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체육관을 다니게 되면 체력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으로 강해지는데 정작 부모들이 파토를 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컷 잘 다니다가도 시험성적이 나쁘면 당장 아이를 체육관에 못 다니게 하는 부모들이 많다면서 오 관장은 ‘상당히 안 좋은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부모의 관점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커트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사진/ (박승화 기자)

사진/ 특고무술로 몸과 마으을 연마하면서 그는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미를 터득했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