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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홍대리, 프랑스에서 꿈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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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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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지역의 벽을 뛰어넘는 만화 공부하고파… 홍대리 연재는 ‘잘릴 때까지’계속

컷1. 청운의 뜻을 품고 한국을 떠난 천하무적 홍대리, 프랑스 파리의 드골공항에 도착한다. 컷2. 홍대리가 푸는 짐가방에서 볼펜이며 종이, 전화기와 의자까지 살뜰하게 챙겨온 생필품들이 쏟아져나온다. 컷3. 커다란 트렁크를 열자 ‘스르륵’ 이마에 빗금이 마구 쳐진 김부장이 튀어나오면서 하는 말 “회사 비품 집에 가져가지 말랬지?”

조만간 이런 내용의 홍대리 만화가 등장할지 모른다. <천하무적 홍대리>의 작가 홍윤표(34)씨가 프랑스로 떠난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카툰을 공부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변질되는 냄새가 싫었다


“이거 비밀인데, 하하. 쑥스러워서….” 처가와 본가로 한국에 남는 짐을 나르다가 달려온 홍씨는 수줍은 홍대리처럼 싱겁게 웃는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와이드 인터뷰임을 알고 나서는 당황한 홍대리처럼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거 ‘사람이야기’ 인터뷰 아니었어요?” 더 민망해한다.

“꼭 만화공부를 하기 위해서 떠나는 건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환경을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급했어요.” 지난해 10월 8년 동안 벌여온 출근투쟁을 포기하고 전업작가로 뛰어들면서 행복했지만 고민이 많이 쌓였다고 한다. “만화가 생계가 되니까, 점점 독자들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물론 작가에게 독자들의 반응은 중요하지만 제대로 그리지도 못하면서 요령만 느는 것 같고, 스스로 변질되는 냄새가 느껴져요.” 전업작가로 일하면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 박찬호 야구경기를 보는 즐거움”과 출근 걱정 안 하고 자유롭게 밤샘작업을 한 뒤 완성된 작품을 보는 성취감은 직장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렇지만 작업량이 늘어나다보니 반복적인 일상이 다시 생겨나고 변하는 세상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도 몰려왔다. 만화공부를 시작하면서 유학을 꿈꿔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일이 빨리 추진된 이유다. 회사일에 허덕이던 그에게 96년 한겨레문화센터의 만화강좌 안내서를 안겨준 아내 덕도 컸다. “제가 워낙 게으르고 수동적이거든요. 이번에도 아내의 독려가 없었으면 아마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그의 유학 계획을 듣고 “집에서 가만 있냐?”고 물었던 직장 동료들은 “부인이 존경스럽다”며 그에게 한없는 부러움의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행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카툰을 그리고 싶다는 그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꼬마적부터 <바벨 2세> 같은 일본만화와 윤승운, 박수동씨의 토종만화를 보면서 자란 그가 대학 때 처음 만난 카툰은 충격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마징가 제트 같은 거대로봇만화나 공상과학만화를 따라 그리면서, 만화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대학 때 미술동아리에서 선배가 선물한 모리스 앙리의 카툰집 <돈키호테의 탈출>을 보고는 다른 세계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초현실적이면서도 한두컷의 그림 안에 깊은 철학을 담고 있는 앙리의 카툰을 보면서 그의 그림 방향도 조금씩 변해갔다. “카툰은 아이디어가 좋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머리싸움의 세계이기 때문에 테크닉에 콤플렉스를 느끼던 제게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인랑>과 같은 심각하고 정교한 에스에프만화 작가를 꿈꾸던 그는 카툰 습작을 병행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천하무적 홍대리>다.

만화, 보는 사람의 훈련도 필요

아직 한국의 카툰시장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다. 작가군도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생각하는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지 않아 제대로 공부하기도, 활동하기도 어렵다. “얼마 전에 출간된 레제르의 작품집에 대한 독자평에서 ‘왜 만화가 사람을 골치아프게 만드냐’는 글을 봤어요. 만화를 보면서 그 속에 숨겨 있는 장치나 생각들을 찾기보다는 ‘나를 한번 웃겨봐’라고만 요구하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죠.” 홍대리를 그리면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규칙이나 철학을 집어넣어보려고 하면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았던 걸 기억한다. 물론 자신의 미숙함도 있었겠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나 미술을 감상하는 데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유독 만화에는 그런 훈련을 무시하는지 모르겠다고 섭섭해한다. “만화를 감상하는 데도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린 사람 못지않게 보는 사람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고요. 저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요구하고 끌어내는 그런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전업작가가 된 뒤 시작한 문화센터 강의에서 카툰 감상훈련을 시키다보면 쏟아져나오는 좋은 아이디어에 놀란다. 그러나 시장이 없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들은 사장되고 만다. 작가도, 출판업자도 이런 아이디어 발굴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고 일본의 코믹스만화만 따라가니 일본 만화시장의 작은 불황에도 우리 시장은 허리가 휘청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 징징대는 국내 만화판을 보면 때로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든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카툰이라고 하면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하지만 그는 카툰이야말로 보편성과 대중성이 있는 만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그리고 꿈꾸는 대중성은 수백만권 팔리는 작품집이 아니라 언어와 지역의 벽을 뛰어넘는 이해의 폭을 의미한다. “한국사람이 프랑스 카툰을 보더라도 80%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다니던 회사의 프랑스 직원들에게 <천하무적 홍대리>를 보여주면 20%도 이해하지 못해요. 제 만화가 그만큼 보편적이지 못한 정서라는 거죠.”

세계적인 만화학교가 있는 앙굴렘으로 가지만 그의 목표는 졸업장에 있지 않다. 카툰의 천국 프랑스에서 카투니스트로 인정받는 게 그의 최종목표다. 벌써 그의 노트에는 프랑스 출판사들의 주소와 연락처가 빼곡이 적혀 있다. “처음부터 잘 풀리지는 않겠지요. 문전박대당할 준비는 돼 있어요. 회사에서 영업을 했으니 그런 데는 이골이 났죠. 그래도 뭐 접대 술자리보다 더 괴롭기야 하겠어요?” “프랑스계 외국인 회사에서 몇년 동안 근무하셨으니 불어는 좀 하시겠네요” 말했더니 “회사 다니면서 기초 과정만 열번도 더 등록했었어요” 예의 홍대리식 대답이 나온다.

사진/ "많은 사람들이 만화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나를 한번 웃겨봐'하는 식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보는 이들에게 생각을 요구하고 끌어내는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10년 뒤에 봐도 재밌는 만화를

카툰을 그리러 가지만 그의 분신인 홍대리의 연재는 “잘릴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잘리더라도 홍대리의 캐릭터를 버릴 생각은 없다. 회사를 그만둘 때 만화의 현장감이 떨어질까 우려했던 사람들은 그의 프랑스행을 한번 더 우려하기도 한다. “회사 그만둘 때는 옛날 동료들 취재해서 쓸 거라고 거짓말했었죠. 지금은 또 뭐라고 거짓말해야 하지? 하하.” 어차피 현장감이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건데 이제는 따끈따끈한 현장감보다는 10년 뒤에 봐도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단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면서 영 어색해하는 그에게 “인터뷰하는 거 불편하시죠?” 물었다. “처음 책 내고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별의별 매체들까지 다 끌려다녔어요”, “곤혹스러우셨겠네요”, “아뇨, 좋았어요. 회사 빼먹을 수 있어서. 그래도 월급은 제대로 나오잖아요” 다시 한번 홍대리다운 대답이다. 게으르고, 소심하고, 딴 생각 많은 홍대리가 프랑스에서 벌일 좌충우돌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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