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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본은 한국야구의 무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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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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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스타일에 적응 못해 동반 부진… FA 자격에 전성기 지나고 감독과의 불화도

99년 11월. 한-일 슈퍼게임이 열린 일본 도쿄돔 경기. 경기에 앞서 한국 대표팀의 이희수 당시 한화 감독과 구대성(현 오릭스 블루웨이브)은 호시노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을 찾아 인사를 나눴다. 의례적인 덕담이 오고가다 호시노 감독이 구대성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당신은) 참 좋은 공끝을 지녔다. 그러나 직구와 변화구를 던지는 폼이 다르다. 그럴 경우엔 이곳 타자들에게 구질을 간파당하기 쉽다. 또 1루 견제 의도도 쉽게 노출된다. 구세(버릇)에 신경써야 할 것”이라며 충고했다.

호시노 감독의 지적은 정확히 2년 뒤에 드러난다. 막연히 해외진출의 꿈만 가지고 있던 구대성은 지난해 겨울 미국·일본행을 놓고 고심하다 비교적 손쉬운 적응이 가능하리라 여긴 일본을 선택했고 현재 불안한 마무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팀(긴테쓰 버팔로스)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들쭉날쭉 기복이 심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상대 팀·선수에 대한 분석력 갖춰야


구세. 우리나라 야구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쓰이는 이 일본말은 사전적 의미로 ‘버릇, 습관’ 등을 뜻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섬세함을 제일로 치는 일본야구는 구세 이론이 무척 발달돼 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풍부한 사례와 다양한 분석도구를 통해 수십년간 노하우가 축적된, 일본야구만의 특징이다. 일본어로는 ‘고마카이’(細かい)라고도 한다. 구세 이론의 개요는 결국 상대팀과 상대선수의 작은 약점은 어떻게라도 분석과 버릇을 통해 찾아낼 수 있으며 공략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수의 글러브 위치와 그립, 주자가 나가 있을 때 세트포지션 상태에서의 어깨 놀림, 보폭, 파지법 등을 미세하게 관찰하다보면 다른 점이 나타나고 이것이 승패에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 변화구를 던질 때 벨트 아래로 글러브가 내려가는 선수가 직구를 던질 때는 벨트 위로 올라간다고 치자.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원정기록원의 눈에 단박에 드러남은 물론이다. 요미우리는 지난해 ‘구세’를 컴퓨터로 분석하는 장비를 들여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국내에서도 현대, LG 등이 구세야구에 눈을 떠 상당부분 노하우를 축적시키고 있는 형편. 그러나 아직 국내에서는 주요 변수로 자리잡고 있는 형편은 아니다.

한국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할 경우 스프링캠프서 제일 먼저 교정받는 것이 구세다. 그러나 이 또한 너무 신경쓰면 자신의 폼과 밸런스를 잃어버리기 쉽다. 정민철과 정민태(이상 요미우리)가 대표적인 경우다. 민철-민태는 춘계훈련 동안 빠른 적응에 너무 신경쓰다보니 고유의 폼을 잃어버렸고 이는 결국 밸런스 부재로 이어졌다. 잃어버린 밸런스를 찾는 것은 예민한 투수들한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선수들의 부진은 상당부분 구세이론의 적응 실패에서 비롯한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야구는 “적응이 곧 실력”인 풍토스포츠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사례다. 그러나 겨우 이것만 가지고 국내에서 에이스로 대접받던 선수들의 동반 부진, 아니 몰락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선동열(현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의 일본 진출 첫해 부진을 상기해보자. 선동열은 구세말고도 퀵모션 습득에 애를 먹었다. 주자가 나설 경우 세트포지션에서 투구하는 버릇은 일본에서 역시 필수. 한국에서 주자 견제가 좋기로 소문났던 선동열도 첫해 이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구세’의 연장선상에서 퀵모션은 필수였고 선동열이 다음해 택한 투구폼이 바로 상체를 최대한 구부려 백스윙(공을 글러브에서 꺼낸 뒤 뿌릴 때까지의 모션)을 하는 ‘엉거주춤 폼’이었다. 현재 미국 프로야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뛰는 김병현의 투구 모션을 연상하면 된다.

해외진출 자격을 앞당길 수는 없나

현재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는 선수들의 부진을 설명하는 데 대부분은 전성기를 어느 정도 지나 진출한 탓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현재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정민태, 정민철, 구대성 등은 구속은 그대로지만 타자들이 느끼는 볼끝이 한국에서 활약할 때와 비교해보면 현저히 떨어졌다. 이들은 구단 허용 해외진출 FA 자격인 7년을 한국에서 뛰고 나서 대한해협을 건넜는데 이들의 전성기는 대개 4∼5년차 시절이 아니었냐는 것. 이 때문에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 선수들은 해외진출 자격을 1년 단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또 전성기를 지날 경우엔 잔부상이 많아진다. 신체 적응력이 나이를 먹을수록 떨어지고 이는 부상으로 이어진다. 정민태의 경우다. 정민태는 춘계훈련 동안 아킬레스건을 다쳐 전반기 내내 출전하지 못했다. 일본의 스프링캠프는 우리와 천지 차이다. 보통 2천개가량 볼을 뿌리고 시즌을 맞이한다. 국내 프로야구는 많아야 1200개 정도다.

사진/ 일본감독과의 불화를 해소하지 못해 국내로 복귀한 이종범. 기아 타이거즈 정몽구 구단주와 악수하고 있는 이 선수.(기아 타이거즈 제공)
감독과의 궁합도 커다란 문제. 기아로 새 단장한 해태타이거즈에 복귀한 이종범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호시노 감독과의 불화로 시즌 내내 2군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일본야구의 영웅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감독은 투수 기용에 있어 기대치 이하로 평가받고 있다. 정민철은 올 초 그의 투수기용에 불만을 토로했는데 요미우리 계열의 <호치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 외국인 선수 정민철, 일본야구의 신 나가시마 감독에 반기라는 구도로 갈등을 조장한 바 있다. 부풀려 보도된 감이 있지만 정민철의 불만이 지금도 대단함은 물론이다. 실제 정민철은 한국 프로야구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구위를 춘계캠프 때부터 보여줬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밀려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시즌 개막부터 2군에서 지내다 다른 투수들이 다친 뒤에야 1군에 올라와 서너 경기 던진 뒤 다시 내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타자와 투수 모두 꾸준한 출장기회가 필수지만 나가시마의 눈엔 정민철이 별로였나보다. ‘부잣집 아들 장난감 고르듯’ 선수 사고파는 일에 익숙한 요미우리의 풍토다.

구대성이 활약중인 오릭스의 오기 감독은 요코하마 곤도 감독과 함께 선수들의 자유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한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는, 이른바 일본식 자율야구의 대표주자다. 그러나 최근 구대성의 기용법을 놓고 한국 프로야구 관계자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팀이 리드하는 경기 후반 상황에서 소방수 구대성은 나오지 않는다. 어떤 날은 동점에서 3∼4회씩 마구 던지게 만든다.

“야구는 어디에서나 똑같지 않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이미 사라진, ‘올드패션’ 기용법이다. 외국인 선수 구대성의 군기잡기라는 얘기도 이래서 나온다. 어찌됐건간에 일본은 외국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들은 용병이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일본 프로야구가 원하는 대로 해주거나(선동열 홍보위원), 아니면 내건 내가 지킨다(이종범과 현 보스턴 레드삭스의 이상훈)는 태도가 그 하나다. 일본 프로야구의, 감독의 간섭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이를 무시하고 하던 대로 하느냐다. “야구는 어디서나 똑같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진출했다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좌절감은 2배로 다가오고 그래서 결국 서두르게 된다. 서두르다 2군에 계속 머물거나 부상을 당했다.

역설적으로 한국 프로야구가 배출한 천재타자 이종범을 쫓아낸 호시노 감독 스타일로 한번 얘기해보자. 호시노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꿈이다. 팬사인회에서 곧잘 꿈 몽(夢)자를 써주곤 한다. 호시노 감독은 혹시 사석에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선수들을 놓고 이렇게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야구는 어디서나 똑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원대한 목표와 꿈이 있을 때 아닌가. 무턱대고 고액의 연봉만을 노린, 해외진출 아닌가.”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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