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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재판정”

법정영화 <의뢰인> 손영성 감독 인터뷰… “가장 어려운 지점에서 균형 잡아준 박희순이 제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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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29 14:28 수정 : 2011-09-3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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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뢰인>. 올댓시네마 제공
국내 최초의 본격 법정영화 <의뢰인>이 개봉된다. 하정우, 박희순, 장혁 등 출연진도 쟁쟁하다. 최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미끈한 장르물을 뽑아낸 감독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가 <약탈자들>(2009)로 장편 데뷔한 손영성 감독이라니, 구미가 당긴다.

황진미(이하 황) : <약탈자들>을 굉장히 흥미 있게 보았다. <약탈자들>이 장르에서 완전히 이탈한 해체적인 독립영화이고, <의뢰인>이 장르에 완전히 몰입한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상반된 듯하지만, 본질은 같다. 기저에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위로 사건을 둘러싼 담론들이 마구마구 쌓이며 충돌하는 구조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의뢰인>을 어떻게 찍게 되었나.

손영성 감독.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손영성(이하 손) : <의뢰인>의 제작사에서 이춘형 작가의 시나리오를 보고 내게 연락해왔다. 이런 법정영화는 <약탈자들>을 찍은 내가 만들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 다들 알아보는구나. 시나리오를 봤을 때 생각은 어땠나.

: 제목이 마음에 들더라. 나는 ‘의뢰’를 받은 사람이다. 영화 속 변호사가 “믿고 안 믿고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던가.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나와 제작자와 관객이 두루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약탈자들>은 친절한 영화가 아니고, 그게 매력인 영화지만, 많은 관객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 법정은 굉장히 역동적인 담론의 각축장이고, 일종의 극장 같은 곳 아닌가? 법정드라마는 매력 있고 지적인 장르인데, 그동안 우리나라엔 거의 없었다. 형사나 검사의 수사 과정을 다룬 영화가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더 아쉽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 이번 영화를 찍기 위해 법정 취재를 하고 국민참여재판도 참관했는데,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더라. 살인사건 재판이었는데, 피의자가 부인하다가 검사가 주검 사진이랑 증거들을 보여주니까, 배심원들의 분위기가 순간 쏴~해지는 게 정말 드라마틱하더라. 법정영화가 없었던 이유는 배심제가 도입되지 못한 탓이 아닐까? 2008년부터 국내에 배심제가 일부 도입되긴 했지만 결정권은 없다. 물론 배심제 자체도 감정에 호소한다는 등 장단이 있지만, 배심제가 없었던 탓에 국민이 사법적 판단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고 관심도 적은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 영화 속 배심제는 좀 형식적으로 그려져 있더라. 국내 제도의 한계 때문인가.

: <의뢰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그 대목이다. 배심제는 입체적으로 그리자면 드라마적 요소가 많다. 배심원 선임이나 표결 과정 등등. 영화에서 빈약하게 그려진 건 제도적 한계가 있는 국내 현실을 반영한 탓이기도 하지만,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에 집중하려고 곁가지를 쳐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배심원들의 자리는 관객이 채운다고 생각했다.

: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나. 난 장혁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던데.

: 장혁은 본인이 해보지 못한 절제된 연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하정우의 연기는 <멋진 하루> 등과 겹치는 면이 있지만, 자기 잘못을 수정하고 성장하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인물의 묘사로 적당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다 멋지게 제 역할을 해냈다. 무엇보다 박희순은 가장 어려운 지점에서 영화의 균형을 훌륭하게 잡아주었다. 제일 고맙다.

: 변호사와 검사의 대립 구도에서, 정황만으로 과잉 수사를 한 것이 옳지 않다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변호사도 과잉 수사 논란으로 옷을 벗은 검사였다. 과잉 수사에 대한 변호사의 입장은 정확히 뭔가.

: 시나리오상에서 변호사는 검사 시절 과잉 수사로 피의자가 자살하고, 이에 대한 부채감을 지닌 캐릭터였다. 이를 생략한 건 이 영화가 전문직 드라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사는 검사로서,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롤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은 검사이고, 변호사는 이 과정에서 절차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탄핵하면 된다.

: 맞는 말이다. 상황이 다 끝나고 나면, 검사는 ‘주검이 없는 사건’으로 무리한 기소를 할 게 아니라, 주검을 찾는 데 더 집중했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게 <형사 콜롬보> 같은 형사물이라면, 주검은 어디 갔는지, 동선은 어찌 되었는지 브로커가 했던 수사를 형사가 했을 것이다. 검찰은 실체적 진실을 입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무리수를 덮으려고 ‘뻘짓’을 계속하느라 본질을 놓쳤다.

: 변호사가 주목하고 물고 늘어진 것도 바로 검찰의 그 ‘삽질’이었고.

: 사실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자명한데, 그 와중에 있을 땐 안 보이고, 논란 위에 논란을 쌓는 형국이 되곤 한다. <약탈자들>도 실체적 진실은 허무하지 않나. ‘초라한 진실과 이를 둘러싼 허망한 담론’, 뭐 이런 주제와 구조에 계속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법정영화를 또 해볼 생각이 있나.

: 아니다. 법정영화는 이미 다른 분들이 준비하는 영화가 많다. 요즘 관심 있는 것은 인터넷 현상이다. 황우석 사건, 타진요, 미네르바 등등,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담론의 형성과 유통 같은 것 말이다.

: 와우, 그 주제에 딱 맞는 소재인 것 같다. 우리나라야말로 그런 영화를 찍기에 최적의 토양이고.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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