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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머니 자연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길

자연에 대한 서양사상의 변천사를 정리하며 생태건축을 논의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시도한 <임석재의 생태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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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22 15:22 수정 : 2011-09-2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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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호그의 <버려진 모태의 땅>(1938). 인물과 사상사 제공

자연 훼손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산업혁명으로 기계를 부지런히 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다. <임석재의 생태건축>(인물과사상사 펴냄)을 쓴 건축사학자 임석재 교수(이화여대 건축학과)는 현재의 환경 위기는 서양문명 전체에 걸쳐 ‘오랫동안 계속돼온’ 그릇된 자연관의 끝자락에 나타난 말기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류문명사 내내 한 번도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탐욕이 자연 훼손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었고, 자연은 언제나 인간 탐욕의 제1대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종교·생태학·역사·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 시선을 두고 서구문명사 전체를 조망하며 자연에 대한 서양사상의 변천사를 정리한다. 그는 이런 정리가 시도돼야만 아직 종합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생태건축’에 대한 정의가 명확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생태건축이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태건축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어떤 기초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도구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인간 탐욕의 역사

인물과 사상이 펴낸 <임석재의 생태건축>
임 교수는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곱 번의 위기와 일곱 개의 자연’으로 나눠 설명한다.

서양에서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기원전 6세기 이전, 흔히 ‘소크라테스 전파’로 통칭되는 사상가들에 의해서였다. 소크라테스 전파는 자연을 “총체적 생명체로서 독립성을 갖는 존재”로 인식한다. 자연을 인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존재로 정의한 것이 지구상의 ‘첫 번째 자연’이다.

그러나 철기문화가 발달하자 자연을 물질로 파악하고 대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정신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이상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분법의 출현이다(‘첫 번째 위기’). ‘이데아 이론’으로 이분법을 집대성한 플라톤은 현실 자연이 단순한 물질이라면 이데아(초자연)로서의 자연은 ‘성스러운 공예’라 정의했다. 여기서 물질을 열등한 것으로 폄하한 플라톤의 논리를 따른 사람들은 ‘자연=물질=열등한 것=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 인식했다. 사람들이 자연을 마음껏 개발해도 좋다고 허용한 셈이다.


이런 자연론은 로마시대와 중세 기독교 문명에까지 이어졌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던 로마 사람들은 자연을 장식적 대상, 볼거리, 방해물 등으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 위기’다. 로마 문명이 쇠퇴하고 기독교 문화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이 위기는 지속된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자연을 하늘이나 우주와 동의어가 되면 신령스러운 것, 눈에 보이는 지상의 자연은 인간에 종속된 것으로 구분했다.

이에 반해 중세 가톨릭은 자연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적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대상이자 통로로 여겼다(‘두 번째 자연’). 기독교의 반생태적 속성에 대한 해법이 제시되는 듯했으나 이런 논리는 다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문명의 등장으로 뒤집히고 만다. 문명의 중심에 자리잡은 인간중심주의는 본격적인 자연 정복의 서막을 열었다. ‘세 번째 위기’의 시작이다. 이를 극복한 것은 자연을 감성적 대상으로 정의하는 낭만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다(‘세 번째 자연’). 자연의 숭고미를 그린 풍경화가 유행하거나 건축에서 과거의 유적을 발굴된 그대로인 폐허 상태로 감상하는 운동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위기는 반복된다. 기계론적 자연관이 등장해 자연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던 첫 번째 자연관이 완전히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네 번째 위기’를 뒤집은 ‘네 번째 자연’은 자연을 영적이고 성스러운 것으로 바라본 자연철학이다. 이를 다시 뒤엎은 것이 ‘다섯 번째 위기’ 산업혁명이다. 생산력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로 확장되면서 인간의 물욕도 통제할 수 없는 크기로 팽창한다. 대규모 벌채, 토지집약적 농업, 광업의 활성화, 도시화, 석탄연료 사용 증가 등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이용한다.

다섯 번째 위기는 사회 변화를 가장 큰 폭으로 보여준다. 이를 가로막을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내부에서 자성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 사회운동’이다. 산업화·자연파괴·물질주의·자본화 등을 경계하고, 정신적·영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종교 본연의 임무를 저버린 데 대한 반성과 경계의 운동이었다. 기독교 사회운동에서 자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거의 없지만, 산업화·자본화를 반대하는 간접 경로를 통해 자연파괴를 자연스럽게 일정 부분 늦추는 역할을 했다(‘다섯 번째 자연’).

그러나 산업화의 영향력은 워낙 막강했다. 19세기 서구 사회는 누가 더 빨리 산업화를 이루느냐가 관건이었다. 근대적 대도시가 형성되고, 무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도심의 고층 건물들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은 ‘물신’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여섯 번째 위기’에서 자연은 재화 획득을 위한 원자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연이라는 모태에서 분리시킨 인류는 분리 불안을 겪기 시작한다. 돌아갈 모태가 없는 영적 방황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대도시에서 탈출해, 자연과 화해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농촌 미학’과 ‘교외 이상’이라는 ‘여섯 번째 자연’이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자연중심주의로

사람들의 이런 노력에도 한 번 시작된 환경 위기는 20세기 들어 더욱 가속도를 낸다. 19세기 환경 위기가 유럽과 미국 등 몇몇 선진 산업국가의 대도시에 국한된 문제였다면, ‘일곱 번째 위기’의 시대에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인 것으로 확산된다. 이에 사람들은 기술로 기술의 폐해를 돌파하자는 대안을 내놓지만 ‘기술득세주의’는 생태적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임 교수는 우리가 맞닥뜨린 일곱 번째 위기의 대안을 먼 과거에서 찾는다. ‘유기체로서의 자연’이다. 그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까지 포함하는 종합적 생명의 장으로서 자연을 인식하고 이런 생명체에 인간도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환경위기를 새로운 기술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태도는 전형적인 인간중심주의라며 다시 자연중심주의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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