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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목수와 예술 그 중간 어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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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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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자로 전업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의 작가 김진송씨, 그가 만든 기이한 물건들

‘게으름뱅이를 위한 테레비 시청용 두개골 받침대’, ‘소파가 있어도 바닥에 앉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등받이’, ‘의자에서 책상다리를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을 위한 의자’. 목수 김씨가 만드는 물건에는 때로 이처럼 긴 이름이 붙는다. 여느 가구점에서 만날 수 없는 기이한 용도의 물건들을 보는 순간 “이거 예술 아냐?” 하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습관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물건들이 구경하기만 좋은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벽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다가 점점 몸 전체가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벽에 수직으로 기댄 목만 혹사시킨다거나 의자 끝부분에 오른 다리, 왼 다리를 번갈아 올리다가 옹색하게 가부좌를 트는 사람이 좀 많은가. 밥먹을 때, 일할 때, 쉴 때, 그 크고 작은 움직임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가구의 중요한 역할일진대 이 물건들은 썩 유용한 가구다. 더 나아가 이 물건들은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달콤한 말이 실상 얼마나 이기(利己)적인가도 깨닫게 해준다. 의자나 책상 등 기성품으로 만나는 가구들은 그것들이 해결해야 하는 불편함의 내용을 미리 정해 놓고 그 밖의 불편함은 인정하지 않으니까.

‘시장통’ 같았던 전시회 분위기

목수 김씨, 김진송(42)씨는 이런 물건들이 “틈새시장을 겨냥한 아이디어 상품”이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올해로 5년차, 수십년 동안 목재를 만져온 목수들과 비교해 스스로 “얼치기 목수”라고 말하지만 꼬박 4년 동안 톱과 끌질로 생계를 이어오는 데 성공했으니 목수라는 타이틀 앞에 늘 붙어다니던 낯간지러운 단어 ‘문화평론가 겸’을 이제 떼어도 좋지 싶다. 얼마 전 김씨는 세 번째 전시를 마치고, 목수일을 시작한 97년부터 써온 일기를 묶어 <목수일기>(웅진닷컴 펴냄)를 상재했다. 4년 전 이른바 ‘먹물’에서 육체노동자로 전업, ‘목수일과 예술 비슷한 일, 그 중간 어디쯤인가’에서 살아온 김씨의 속내를 보여주는 책이다.


“작품이나 예술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예요. 난 그저 물건 잘 만들어서 팔아먹는 게 목적이니까. 작품이라고 하면 파는 데 지장있어요.” 더도 덜도 아닌 목수임을 강조하는 김씨지만 남양주시 수동면, 개울을 앞에 둔 밭자락 한쪽에 지어진 그의 작업장은 나그네의 눈길을 바쁘게 만드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나무 새와 물고기들. 금속으로 제작한 삽날개발광충과 철갑두른말. 사람의 발모양을 딛고 선 탁자와 잠자는 여우모습을 닮은 의자. “전시회에서 팔고 남은 물건들이에요. 새나 곤충 등 장식용 물건들은 전시회 관객 서비스 차원에서 만들었던 거고….”

98년과 99년 그리고 2001년 6월, 세번 열렸던 그의 전시회는 전시회라기보다는 시장통 같은 분위기였다. 고상한 미술계 ‘인사’들은 찾아볼 길 없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왔다. 관객은 값이 매겨져 있는 의자나 탁자에 앉아보기도 하고 실제 흥정을 벌이기도 한다. 시장통 같은 게 아니라 그의 전시는 시장통인 셈이다. 전시회 때 50∼60점을 내놓은 물건 가운데 반 정도가 팔리는데 물건과 바꾼 돈은 그가 생계를 꾸려가는 수단이다.

목수나 동네 아낙들, 시골 노인들이 목수 김씨전의 주요 관객이지만 고객은 아무래도 여유있는 사람들이다. 보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물건값, 목수생활을 하면서 그가 갈등을 느껴온 적지 않은 문제다. “제 나무 만지는 실력을 중간 숙련도 정도로 책정해서 하루 일당을 10만원으로 매겼어요. 거기다 제작일수를 곱해서 가격을 정하죠.” 제작일수에 숲이나 길에서 찾아낸 나무를 작업실까지 끌고 오는 데 드는 무지막지한 시간과 힘은 빠져 있다. 작업실까지 끌고 온 나무를 6개월이고 1년이고 말리는 데 드는 비용도 빠져 있다. 그래도 의자 하나에 60만∼70만원을 호가한다. 가구 하나도 대를 물려 쓰는 외국인들에게는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지만 뭐든지 후딱쓰고 후딱버리는 우리네 문화에서는 ‘백년 수명 보장, 평생 애프터서비스 약속’도 여염집 가계의 용기를 북돋기 어렵다. 전시회에 나오는 물건 50∼60점 가운데 반 정도가 팔리니 1년 수익을 따지면 대졸 출신의 대기업 초봉 정도. 가격을 낮춘다면 네 식구 생활이 불가능하니 일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대량생산을 하면 가격을 좀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죠. 그런데 생산설비나 공방을 차릴 큰돈이 있으면 또 일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삼류평론가’를 판별하는 방법

만약 그가 자신을 굳이 ‘목수’가 아닌 ‘작가’로, 자신의 생산물을 ‘물건’이 아닌 ‘작품’으로 포장한다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될 일이다. 평론가들의 의해 예술이라는 면류관이 씌워지는 순간, 그의 작품은 훨씬 고가로 나갈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그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미술판과 결별하고, 목수일을 시작한 이유에 위배된다. “예술이라면 그럴듯해 보이고, 극소수에게 떠받들여지는 반면 일반인들과는 점점 더 멀어지죠. 그게 다 사기예요.” 한술 더 뜬다. “삼류평론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알려드릴까요? 글에 ‘심오한 예술’, ‘독특한 미적감각’ 따위의 말에 나오면 틀림없는 삼류평론가예요. 아름다움이란 건 지나가는 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거거든요.”

가끔 작업장으로 찾아오는 미대생들과 이야기할 때 답답증을 느끼는 이유도 그런 거다. “의자를 디자인해라, 쟁반을 만들어라 하는 주문은 애당초 틀린 거예요. 쓰임이 먼저지, 형태가 먼저일 수 없다는 말이죠.” 나무를 구해서 모양이나 재질 등을 연구하며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까부터 출발하는 그의 작업방식은 디자인을 완성시킨 뒤 재료를 찾는 공예수업과 전혀 반대된다. “목리에 맞게 쓰면 어떤 나무토막도 쓰임새 물건으로 만들 수 있어요. 아름다움은 부가적인 거지요.” 그러나 그의 물건들은 그냥 보기에도 아름답다. 쓰기에 불편할 거라고 붙잡는 목수 김씨의 만류에도 몇몇 불편한 물건들을 굳이 가져가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래도 그런 물건을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릴 적 두세 시간 찰흙과 씨름해도 코끼리나 강아지가 도무지 나오지 않아 속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생계형 목수일에 딴죽을 걸어본 기자에게 김씨는 “머리가 나쁜 게지요”라며 면박을 준다. “사실 요즘 사람들 손을 쓰지 않아요. 꼭 뭔가 만드는 일이 아니더라도 고장난 수도꼭지 하나 고치는 것조차 직접 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손재주도 없고, 또 뭐 시간도 없으니까” 얼버무린다. 그의 반박이 다시 날아온다. “노동하기 싫은 거지요. 손쓰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수도꼭지 고치고, 전기 배선하는 거 다 중학교 책에 나오는 단순한 원리거든요.” 책에서도 기술했듯이 사소한 일상의 노동도 소화하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펜대 잡는 일’을 직업의 금과옥조로 삼아온 어미 아비 탓이기도 하고, 손놀리고 기름밥 먹는 직업을 천대하는 우리 사회의 ‘고결한’ 미풍양속 때문이기도 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상을 자신의 힘으로 장악하면…

“조금만 궁리하면 십만원 들 일도 돈 만원에 해결할 수 있어요. 9만원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죠. 일상을 자신의 힘으로 장악하면 그만큼 돈과 시간의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도 더 건강해질 거고요.” 수도기술자나 배선기술자들이 들으면 섭섭할 수 있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그들도 자신들의 전문기술을 발휘할 기회가 갈수록 없어져 답답해할지 모를 일이다.

99년, 1930년대 문화보고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등을 냈고, 지난해에는 한 박물관의 전시기획을 관여하는 등 일을 하면서 간간이 그의 옛 전공도 살려왔지만 이제 공부는 그만, 앞으로는 목수일에만 몰두할 생각이란다. 학계나 미술판의 빤한 속물근성이나 상투성과 더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다짐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그러나 10년 뒤 눈을 감고도 톱질을 하는 목수가 된다 해도 스스로 부르는 ‘얼치기 목수’라는 호칭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목수일과 예술 비슷한 일 그 중간 어디쯤’에서 버려진 나무토막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예술지상주의의 위선에 침을 뱉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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